존재의 일정 수치에 미달했을 때 사라지는 세상이라면 좋았을 텐데
십 년도 더 전부터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사라져주고 싶었다. 그에게 대단한 슬픔이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져주는 것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좋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라면 그 정도까지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그를 좋아하니까.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그의 남은 나날이 축복으로 가득차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내가 그의 곁에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라 설령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사라지고 싶어진다.
그래서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좋았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도 나를 절대 받아줄 리 없는 사람들이. 내가 관계를 망칠 여지를 주지 않는 사람들. 내가 망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나는 남을 망칠 수 있을 만큼 대단하지 않지만 단지 그 느낌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 언제나 내가 다 망쳐버릴 것 같으니까. 아니면 조금 덜 소중한 사람들. 이 관계를 망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 외려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정말 오래 함께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과는 결국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 너무 소중하니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 손끝도 못 대고 죄책감과 자괴감만 느끼다가 그대로 멀어졌다. 망치느니 멀어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사실은 지금도 생각한다. 소중하니까.
타인을 좋아하는 만큼 스스로가 싫었다.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비교하고 깎아내리게 되어서가 아니라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들에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나눌 때는 나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을 가져갈 수가 없었다. 디자인된 포장지도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귀엽다고 봐 줄 수 있는 인형도. 나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끔찍한 인간인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이는 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으므로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사람인지 몸소 꺠우치고 인정한 다음에는 결국 사라져주고 싶었다. 이런 걸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둔단 말인가? 그게 내 존재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었다.
누군가가 요즘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할 때 나는 그 말이 낯설다. 만들다니. 꾸준히 어떠한 일에 매달리며 일을 진척시켜 나가고 결과물을 완성해나가고 있다니. 나도 언젠가 보통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 아, 너무 오래 지났다. 예전에 나는 이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반대로 정상적이었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신상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마저도 잊어버렸다. 이제는 그것이 기억이 안 나요.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몰라도 돌아갈 수가 있나요. 의사들은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아마도 사실이겠지. 망상은 바퀴 같다. 의사는 손을 꼭 잡으면서 그건 병이라고 했다. 바닷물이 고무로 된 운동화 밑창을 적신다. 적어도 그런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