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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mji Feb 18. 2022

사람은 꽃과 같아서

daily effect / 나에게 건네는 이야기

20년 전 봤던 영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귀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1972)


16세기,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정복하기 위해 떠난 스페인 원정대. 밀림과 습지를 만나 길이 막히자 선발대 40명을 보냅니다. 이들은 우르수아 사령관, 부사령관 아귀레, 군인, 황금을 탐내는 사람들 그리고 신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신부들입니다. 출발한 지 오래지 않아 유령처럼 출몰하는 원주민들의 습격과 끔찍한 밀림의 환경으로  많은 대원들이 헛된 죽음을 맞아하자 사령관 우르수아는 퇴각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정복욕에 가득 찬 아귀레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사령관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무리한 탐험을 강행합니다. 결국 그는 원주민들의 습격에 모든 대원을 잃고 혼자 남습니다.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신의 분노라고 외칩니다.


뉴 저먼 시네마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현대 예술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몰입해서 봤음에도 저에게는 어떤 장면도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영화 제작 당시 참신했던 영상기법들이 현대의 영화 기법에 흡수되어 90년대의 시각에서는 클리셰처럼 느껴졌던 것이 아닌지, 그래서 대부분의 장면이 잊힌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대사 하나는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었습니다. 반란군에 의해 처형될 운명에 처한 사령관 우루수아의 아내를 위로하는 신부의 말입니다.



"사람은 풀과 같아서 들판의 꽃처럼 피고 바람이 불면 지며 아무도 그 자리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꽃처럼 피어나다", 저는 이 말을 일생에서 단 한번 피어나는 젊음을 뜻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개인이 가진 불완전한 부분이 보완되고  잠재력이 제련되어 개화開花하는, 일종의 삶의 소명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서구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발명된 그들의 사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그 결과를 좋든 싫든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구의 '개인'이라 할 지라도 주변으로부터 유리되어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가 속한 집단에 좀 더 기대어 있고, 집단은 그만큼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합니다. 이 땅에서 근대화가 시작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의 습속이 서구, 그들의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만 삶의 틀, 생각의 뼈대는 쉽게 변치 않는 법입니다.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언제 꽃 피었을까. 아니, 꽃 핀 적이 있었던가. 아니라면 언제 꽃 피게 될 것인가.


새해가 시작되고 벌써 2월, 하반기에 접어듭니다.

여러분 모두 꼭 연초의 계획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 대사가 시편의 한 구절이라는 사실을 금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나 소설 같은 문화 매체를 접하다 보면 귀한 말들을 만나게 됩니다. 되뇌이게 되는 말들. 입속의 보석과 같은 말들. 이 문장도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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