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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mji Jun 12. 2023

말 없는 소녀 The Quiet Girl

daily effect / 나에게 건네는 이야기

'말 없는 소녀'를 상영 중인 시네큐브를 10여 년 만에 방문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좋아하는 극장이었는데 흥행여부와 상관없이 옥으로 만든 소품과 같이 담백한 아름다움을 지닌 영화들을 소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극장의 내부 공간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낡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멀티플렉스에서 느낄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있습니다. 비상업적인 고결함을 풍긴다고나 할까요. 


영화로 돌아가면, '말 없는 소녀'는 두 번째로 접하는 아일랜드 영화입니다. 아일랜드를 생각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존 F 케네디 선조들의 고향 - 1800년대 중반, 가난한 농부였던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작물인 감자에 병이 돌면서 재난과 같은 흉년이 계속되자 신대륙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영화 원스(2007) - 가난한 음악가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제임스 조이스. 이 셋의 공통점은 가난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까지 아일랜드는 유럽의 최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어느 시골집의 막내딸 카이트. 아버지는 알코올과 도박에 빠져있고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한 어머니는 생활고에 지쳐있습니다. 언니들을 포함한 가족들 모두 내성적인 성격의 카이트를 탐탁해하지 않는데 어머니의 출산이 임박하자 카이트는 버려지듯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집니다. 이제 카이트는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 여기까지. 이후의 줄거리는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할 듯합니다. 영화는 불우한 소녀의 성장기로서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플롯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외외였습니다. 95분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야기 전개나 무용 같은 액션, 또는 탄성한계에 도달한 갈등구조가 없음에도 촘촘한 복선으로 영화의 몰입도는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들의 감정묘사가 좋았습니다. 등장인물 중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미안해", "사랑해'과 같은 직접인 말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과자 한 개, 창을 향해 돌어선 남자의  뒷모습이 이것을 대신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라스트 신.


건축가 켄고 쿠마는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일상을 빛나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도 그렇습니다. 잘 감지되지 않는 일상의 따스함을 일깨워줍니다. 빡빡한 일상에 치여 동결건조된 마음을 되돌리고 싶은 분들께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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