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로병사의 배경은 건축입니다. 삶은 건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애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던 공간, 옹알이를 하고 잠들었던 공간,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었던 공간, 봄소풍 장소였던 동물원과 박물관, 지척에 불과한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의 배움의 공간이 되었던 교실 모두 건축입니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렇다면 삶 이후를 위한 건축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치바현의 이치키와시에는 1617년 건립된 사찰인 소네이지總寧寺가 있습니다. 편안함이 가득한 절이라는 뜻인데, 이곳에 망자의 묘가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태어날 때는 신사에서 참배하고, 교회에서 결혼하며, 세상을 떠날 때는 사찰에서 혼을 위로받습니다. 각자의 믿음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기본적인 삶의 패턴이 그러합니다. 사찰은 인근에서 살아가는 주민을 위한 마음의 안식처이며삶 이후에는 그 마지막 거처가 됩니다. 이렇게 마련된 소네이지 경내 묘지 초입에 SANAA에서 설계한 파빌리언이 서 있습니다. 건물의 이름은 무유주린無憂樹林,근심이 없는 숲이라는 뜻입니다.
SANAA 는 숲과 같은 건축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숲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나무 밑의 단단한 땅은 모두 훌륭한 거처가 됩니다. 나무들이 위요하는 공간이나 뻗어 나온 가지 밑은 훌륭한 휴식공간입니다. SANAA는 세장한 다수의 금속제 기둥을 숲과 같이 밀도를 높여 배치하는 건축 구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부러질 듯 가느다란 직경 60mm의 알루미늄 기둥이 건물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는 기둥이 수직으로 내려오는 하중만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지진이나 풍력 등 옆에서 가해지는 힘은 구부러진 세 개의 벽체가 담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최대한 얇고 가볍게 하기 위해 두께 12mm의 알루미늄 플레이트로 제작했습니다. 약간 뒤로 들쳐지는 듯한 지붕의 곡면은 지면의 굴곡을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우수처리를 위한 섬세한 배려입니다. 이렇게 경량화되고 군더더기가 제거된 디자인은 건물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대신 최소의 거처로서 주변 환경에 녹아들도록 하는 의지로 보입니다. 세장한 기둥의 숲은 건물의 투명성과 더불어 묘한 안정감이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무유쥬린無憂樹林, 이름에 걸맞은 숲과 같이 평화로운 공간입니다.
그럼 SANAA의 의도는 참배를 위한 편안한 공간의 제공, 그뿐일까요.
망자의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반대에 있는 삶의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SF소설가 르네 바르자벨Rene Barjavel은 과학 소설의 대표자답게 인간의 삶을 냉철하게 바라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법칙과 관습의 틀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완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만족스러워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은 인간이란 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삶을 맛볼 수 있고, 그런 후에는 그것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하는 허깨비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생식자다. 받은 생명을 다시 전달할 뿐이다. 인간은 오직 이것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생각하고, 일하고, 투쟁하고, 고통받는 것은 모두 이것 하나를 위한 것이다.”
르네 바르자벨, 야수의 허기, 1971
인류는 종족보존을 위한 유전자 전달자이며 인생은 그 과정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고에서는 삶은 기계적인 인과관계의 결과물이며 선형적입니다. 삶이 끝나는 곳이 죽음, 시작과 끝이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견해가 있습니다. 삶 속에는 이미 죽음이 내포되어있는 것이죠. 이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만 이때 삶의 각성이 따라옵니다. 소설가 폴 오스터Paul Auster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줍니다.
“플리트크래프트는 철저히 판에 박힌 남자, 즉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성공한 사업가로 불평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날 오후 그가 점심을 먹으러 걸어가고 있을 때 건축공사장 10층에서 들보가 떨어져 내려 한바터면 그의 머리에 맞을 뻔한다. - 중략 - 그렇더라도 그 구사일생한 사건으로 그는 몹시 놀랐고 마음속에서 그 일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해밋이 말한 대로라면 <그는 누군가가 삶의 내막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보여 주었다고 느꼈다>. 플리트크래프트는 세상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 처럼 온건하고 질서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 자기는 처음부터 내내 잘못 생각했고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라는 것”
폴 오스터, 신탁의 밤, 2003
소설 속 주인공은 죽음 언저리에서야 삶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삶은 견고하지 않습니다. 머금은 이슬 한 방울에도 잎이 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배의 공간은 그것을 깨닫고 되씹는 공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망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SANAA은 이 건축을 투명할 정도로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가려져서는 안 될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면은 제의의 동선에 따라 짜여 있습니다. 세 개의 잎사귀와 같은 형태를 이어서 도입 공간, 참배를 위해 물을 뜨는 공간, 참배의 공간 그리고 공양탑을 바라보는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했습니다. 모든 움직임이 드러나도록 계획했으며, 제의를 담는 투명한 공간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굳건하기보다는 연약하고,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삶의 양태를 부각하는 건축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의 깊게 공들여 만든 결과물입니다. 제의를 위한 공간과 망자의 공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결과 묘지는 삶을 위한 공간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이 곳은 참배를 온 이들의 각성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건축설계의 과정에서 멋, 법, 비용, 기술, 경제성 등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궁극의 지향점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건축가는 삶을 건축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