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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의도비주류 Apr 06. 2022

비서에게 뒷담화가 필요한 이유

'있는 그대로 국회'와 '국민이 생각하는 국회' 사이의 간격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내가 쓴 메시지가 처음으로 의원의 첨삭 없이 그대로 나갔다. 의원에게 보고를 하면 보통 이런 저런 표시가 되어 있으나 오늘은 표시된 부분이 없었다.


의원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리는 건 국민학교 시절 멈춰버린 내 영어 수준으로 자막 없이 넷플릭스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감히 헤아리기 어렵지만 셋 중 하나라 본다.


1) 의원이 바빠 시간이 없었다.

2) 한 번쯤은 이런 때가 있어야 한다고 배려해주셨다.

3) 의원이 고친 것을 내가 모른다.




어느 의원실이나 써야 하는 메시지 종류도 여러 가지지만, 축사는 몹시도 많다. 입학식, 졸업식, 운동회, 세미나, 토론회.. 그리고 무슨무슨 날들도 끝없이 많다.


우리 방은 축사 하나도 의원이 첨삭한다. 여러 의원실을 경험했는데, 이처럼 축사 한 글자 한 글자까지 첨삭하는 의원실은 처음이다.


첨삭을 너무나 꼼꼼하게 해 주시는데, 꼭 연필로 해주시는 것이 참 따뜻하게 느껴진다. 연필 첨삭이 따뜻함을 주기는 해도 빽빽하게 고쳐진 종이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다.


겨우 글 하나 때문에, 오늘 아침의 시작이 가벼운 마음이다. 뛰어갈텐데 날아갈텐데 싶다.




나처럼 일희일비하는 성격은 비서로서 몹시 곤란하다. 사람을 모시는 일이라면 그 상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예민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챈 일들에 대하여 나 자신이 영향을 받는다면 선배 동료 직원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내 삶의 질이 위험해진다.


그런 비서가 훗날 보좌관이 되면 더욱 심각할 것이다.


의원이 기침하고 이를 알아챈 보좌관이 그대로 아래로 쏟아부으면, 그 의원실은 폐병에 걸리는 것과 유사한 증상을 겪게 될 수 있다.(이진수 '보좌의 정치학' p.23)




그럼 비서가 하는 일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다음과 같은 정도의 답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유일하게 빠뜨리지 않는 라디오 프로그램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 박세훈 작가가 '방송작가'의 업무를 설명하는 데에서 힌트를 얻었다.)


국회라는 큰 쇼핑몰이 있다. 30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300명의 사장이 음식점을 경영한다. 사장이 경영방침을 정하고, 자문을 구하고, 자원의 활용 방향을 잡고, 사람을 구하고, 주력 메뉴를 선정하고, 필요하면 자금을 직접 융통해야 하기도 한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고,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재료를 손질하고,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계산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범위의 일이 벌어지는 음식점이 그런 것처럼.



그렇게 경영되는 가게에서 직원들의 일은?

사장님이 하시는 것 빼고 다 한다.


사장이 아무것도 안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사장님과 함께 하기도 하고, 사장님보다 일찍 출근해서 오픈 준비를 하기도 하고, 미리 재료를 손질해두기도 하고, 가끔은 사장님이 갑작스레 시키는 일을 해야 하고 챙길 일이 나름 많다는 말이다.


사장이 가게를 지키며 직원보다 더 열심히 하는 가게도 있고,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보다 큰(?) 사업을 위하여 외유에 열중하시는 가게도 있다. 어느 가게가 더 좋은지는 각자의 판단 영역이다.


어떤 직종에서도 사장을 해보지는 않았으나 종업원이 사장보다 일을 더 한다고 할 수도 없고 사장이 더 편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내 이름 걸고 하는 장사라 알바보다 훨씬 큰 부담감과 책임감이 따르리라 짐작한다.


음식점마다 컨셉이 다 다르다. 어떤 집은 고급화 전략으로 가진 사람들을 손님으로 모실 준비를 하기도 하고, 어떤 집은 맛으로 승부하려 하기도 하고, 어떤 집은 메뉴의 다양성으로 차별화하려 하기도 할 것이다.


사람을 채용하는 것도 조금 비슷하다. 어떤 곳은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주방장을 모시고자 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부하직원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매니저를 모시는데 중점을 둘 수도 있다. 어떤 사장은 관리자를 두고 인사를 포함한 경영에 관하여 일체 위임을 하고 결과로 평가하다시피 할 수도 있다.



  <사진출처 : 국회 홈페이지>




국회는 전문가들, 경력자들에 대한 선호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회 경력 없이 인턴 과정을 건너뛰고 비서관급 이상 별정직공무원으로 임용되는 일이 드물어졌다. 반면 변호사, 변리사, 노무사 같은 전문직들에 대한 채용을 선호하는 경향도 보인다.


음식점이 비슷하게 보이지만 각 점포의 사장님의 경영철학이 다르고 요구하시는 바가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다른 것처럼, 의원실도 의원님이 요구하시는 업무범위나 강도가 꽤 다르다.


입법과 감사기능이 단연 중요하지만, 의원실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의원님이 주요 당직을 맡거나 의원이 겸직 가능한 장관 등 자리에 입각하면 업무내용이나 강도도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의원실 이야기를 하든, 의원님 이야기를 하든 그건 일반화하기 몹시 어렵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한참 말하고보니 근엄한 목소리가 지금 들린다.

아니 어떻게 쇼핑몰에 비유할 수 있어?

'국민을 위한 쇼핑몰'이라는 답으로 수습해본다.




국회는 '국민을 위한 국회'를 표방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다수 국민들과 국회는 몹시 먼 사이처럼 느껴진다.


국회의 권한과 책임이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뭘 한다고 해도  와닿지 않는다. 싸움만 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각종 조사에서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으로 나타난다. 대한민국 공공부문에 대한 신뢰도 자체가 낮은 편이기도 하지만, 국회가 개혁대상으로 여기는 법원이나 검찰보다도 부정 평가율이 높게 나오기도 한다.



    <사진출처 : JTBC>



무엇보다 국회의원들은 다른 세계 사람처럼 여겨진다. 지인들이 국회를 방문하거나 국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면, 국회의원들이 나름 평범하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택시를 타는 의원들을 보고 의아했다거나 구내식당에서 식권을 내고 직접 밥을 떠먹는 국회의원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내심 ‘택시를 타는 의원들을 보고는 왜 그게 놀랄 일이지? 버스를 타는 것도 아니고.. 의원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게 왜 놀랄 일이지? 사무실에서 직접 밥을 해 먹는 것도 아니고..’ 라 는 생각에 순간 멈칫한 때도 있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마땅한 일은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 하고, 밥을 먹어도 우리와는 다른 메뉴를 드시고, 술을 먹어도 우리와는 다른 곳(?)에서 드시고, 어딜 가든 에어컨 빵빵한 대형세단으로 오가고, 기차를 타도 보좌관 없이는 못 타는 사람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과하게 그려지는데, 2019년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보좌관'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탐욕스러우며 온갖 비리와 불법으로 점철된 인물 송희섭 의원(김갑수)의 모습이 국민들의 인식 속에 국회의원 이미지와 유사한듯하다.




국회의원이 발언할 때 자주 들어가는 키워드 중 대표적인 것이 '민생'과 '현장'이다. 맞는 말씀이다. 민생에 답이 있고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회라는 현장도, 국회의원의 삶도 조금 더 가감 없이 민생 곁에 알려져야 한다. 필요하다면 '셀프디스'라도 해야 한다.


국회와 국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국회의원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는 유능한 비서관도 아니고 국회 보좌진 경력도 짧다. 그런 내가 하기엔 조심스러운 글이고 주제넘은 일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지만, 국회의 일상 이야기가 보다 더 많이 오가야 한다고 믿는다.


부풀려진 맘과 꾸며진 말들이 행여나 누군가에게 해가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비서에게 뒷담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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