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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의도비주류 Jan 27. 2023

인턴의 대리운전

낮엔 여의도 사무실에서, 밤엔 강남 거리에서 살던 카카오대리기사 후기

대통령이 장관 후보자를 지명하면, 국회에는 '인사청문요청서'가 전해진다.


보통 '어떤 어떤 경험을 갖추었고, 이런 저런 일에 기여도가 뚜렷하고, 신망이 두터워 적임자이다'라는 하나마나한 말로 마무리되는 요청서인데, 이 요청서와 함께 병역, 재산, 납세 등에 관한 사항이 첨부자료로 딸려온다.



내가 담당한 모 장관후보자의 인사청문요청서에서 내 눈길을 가장 먼저 끈 것은 '딸의 정보공개를 거부한다'는 내용이었고, 그 사유가 '딸이 미국에서 월 120만원 이상 벌고 따로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인사혁신처 1인가구 독립생계 소득기준이 116만원이고, 공직자윤리법과 국회규정에 의하면 대략 그 정도 돈 벌고 따로 살면 명목상으론 독립생계로 인정해주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녀의 학비, 주거비 등 내가 따로 조사해본 그녀의 고정지출액만 봐도 사실 그녀가 주장하는 소득이 독립생계의 근거가 되기엔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독립생계가 아니며, 탈세 의혹까지 생기는 지점이다.)


A장관 후보자의 딸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순수 학비 지출만 연간 7만 6,950불이고, 학교에서 산정하는 생활비 등 부대비용까지 포함하면 연간 12만 4,389불 정도에 달했다.

(원달러 환율로 계산하면, 우리 돈으로 연간 1억원도 훨씬 더 든다는 말이다.)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기숙사의 임대료만 하더라도 최소 1,700불~2,319불로, 본인이 번다는 연소득 25,000불 거의 대부분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연소득 25,000불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분투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눈물겨운 아메리칸드림'으로 정부 차원에서 찾아서 표창을 주고 학비를 지원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것도 불가능한 것이 후보자는 '독립생계'라는 사실을 문서로 입증(?)했으니 그 이상의 추가적인 자료 제출은 못하겠다고 버텼다.




자료를 반복하여 요청하면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담당부처 공무원을 달래보기도 했다.


"사무관님! 장관님께 잘 말씀드려서 자료 주시고요. 이만저만해서 학비 지출이 좀 있었다. 자녀가 공부하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공무원 월급 얼마 안되지만 내가 최대한 도와주고, 부잣집 며느리인 고모가 좀 도와주고 그런 것은 사실이다. 가볍게 용돈 정도 준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금액도 커지고, 결국 세금도 빠뜨리고 실수했는데 장관이 된만큼 앞으로는 신중히 처신하겠다 정도로 소명하면 국민 정서 상 납득이 될 만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모두 내 순진한 생각이었나보다. 말도 안되는 소명을 하고 귀를 닫은 그가 장관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성취했으니 결국 그가 옳았던 것일지 모른다.






내 인턴 시절이 떠올랐다. A장관 후보자의 주장대로라면 그 분의 따님도 인턴이었고, 그들이 독립생계를 주장하며 내민 소득금액에 찍힌 금액 125만원(후보자 자녀 연소득 25,000불을 해당국가의 구매력 등을 반영하여 후보자 측에서 환산한 금액)이 내 인턴 시절 월급과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자료제출에 철벽을 치니 없는 인맥을 동원하여 뒷조사를 해야 했다. 뒷조사라고 해봐야 그녀가 거주한다는 레지던스의 임대료와 학비 정도가 다였지만, 알면 알수록 그녀의 삶은 독립생계로서 125만원을 버는 사람의 삶과는 결코 다른 화려한 삶이었고, 내 인턴 시절의 초라한 삶이 떠오르며 대비되었다.

 

약간의 사람들이 나더러 귀족적인 외모라 칭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의원실에서는 선배들로부터 '지역유지 아들'처럼 생겼다는 농담을 듣기도 하지만... 나때 정도 돼야 '독립생계' 아닌가 싶은 마음이 꼰대처럼 들었다.



인턴 시절 2번째 월급명세표. 대략 2년 정도 이 정도 금액의 월급을 받았고, 당시 8시 출근하여 새벽 2-3시에 퇴근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시급으로 치면 2,000원 정도였다.


오라는 직장도 없었으나 군 복무를 마친 것만으로 그저 설레는 여름, 돈 500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군 복무를 마치고 며칠이 채 안된 무렵이었다. 월세집을 구해 보증금 500만원을 건데는데, 그 돈이 꼭 5억원처럼 손이 떨렸다.


월세집은 보증금 500에 월 50.

내 생에 가장 큰 거래의 시작이자 내 서울 생활의 시작이기도 했다.


연애 활동은 생각지도 못했다. 월급 1,500이 아닌 연봉 1,500을 만나줄 여자는 많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많았다. 문제는 월급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안 것은 너무 늦었을 때였다.)


'돈이 뭐 중해' 라는 생각은 철없게도 자주 했지만, 막상 누군가와 현재를 함께 하거나 미래를 꿈꿀 염치도 또한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좀 더 뻔뻔해지고 싶고 뻔뻔해질 수 있는데 그때는 그랬다. 인턴 딱지를 떼고 급수를 받았을 때 가장 기쁜 일은 누군가에게 술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던 것처럼, 인턴 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술과 밥을 얻어 먹는 일이었다. 친구의 슬픈 일에는 최대한 갔지만, 친구의 결혼식에는 못 가는 경우가 많아 그 이후 자연스레 생이별(?)한 친구도 몇 있다.


돈은 어떻게 그렇게 잘 새나가는지… 어디로 간지 모르게 사라졌다. 아파트 월세, 관리비, 전화비 등 공과금에 기본적인 교통비만 해도 125만원은 턱도 없었다.


회의장을 오가고 지역구를 따라다니느라 무제한데이터 요금제를 그때 처음 썼고, 처음 인턴에 들어온 시기가 국정감사 준비기간이라 새벽에 퇴근하면 택시비가 1만원을 넘었다. 당시 9-10월에는 퇴근은 빨라도 자정이었다.



서울 물가를 잠시 탓해보기도 했다. 예컨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삼겹살 가격은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선 지금도 1인분에 1만원만 해도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서울은 15,000원 이상이 시장컨센서스 같았다. (5년이나 지난 지금은 15,000원짜리 마저 잘 없다.)


아무 것도 없는 인턴에게 대출해주는 은행은 없었다. 카드사들이 따뜻하게(?) 현금서비스를 해줬는데, 대출이자만 연 20% 이상 달했다. 카드사들은 자주 '이자 할인이벤트'라며 10%대 후반까지 빌려줄 때가 있었는데, 그때면 더욱 황송한 마음으로 받아썼다.


오래 전부터 '카드돌려막기'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찌보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쓰는 돈은 한정적이라 그 돌려막기에 대한 두려움은 실체적인 두려움이기보다는 언론이나 주변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기에.   


내 후배가 같은 방법을 쓰겠다면, 어떻게든 막아야 할 일이지만 그때 나에게 카드사는 은행보다 감사한 금융기관이었다. 그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지금도 업무상 카드사 직원 분들을 만나면 뭔가 빚진 기분이 든다.




막연한 두려움이긴 해도 쌓이는 빚을 보다가 '대리운전'에 나섰다. 시골에서 처음 서울역으로 향할 때 그 심정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첫 시작을 감행했다.


6시가 지나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늘 그렇듯 야근을 시작했다. 하는 일이 있든 없든 그때는 사무실에 남아 있었는데, 대리운전 앱을 켜두고 일을 했다. 그러면 술시(戌時)가 끝나가는 저녁 9시경이면 경쾌한 멜로디의 '콜'이 들어왔다.  


여의도가 직장인 덕을 그때 많이 봤다. 대리운전은 직종상 콜이 특정시간(밤 10시 전후)과 특정장소(도심)에 수요가 집중되는데, 따뜻한(?)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다가 콜이 들어오면 움직일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가까운 거리의 차량이 배정되는 시스템 특성상, 국회에 있는 대리기사인 나의 첫 손님은 국회 경내에 차량을 주차해두고 간 손님이 대부분이어서 첫 손님은 국회 직원이거나 출입기자 혹은 관계기관 직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가장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 당시엔 컴플렉스를 느낀 것은 아니었는데, 보좌진 선배라도 마주치면 국회 쪽팔리는 일로 보지 않을까 막연하게 두려웠다. 모든 손님과 대화해 본 것은 아니라서 확실친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같은 보좌진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걱정과는 달리 그저 참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다만 무례하게 대하는 모 공공기관 직원으로 추정되는 분을 모신 일이 있는데, 그 분이 만약 국회 내에서 나와 조우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텐데 싶어서 내 처지와 주변이 코미디처럼 느껴진 일은 있었다.




대리운전이 체질에 맞은 것은 참 다행이었다. 꼭 새벽운동을 나가는 것처럼 나가는 것이 너무나 귀찮고 번거로웠지만, 일단 런닝머신 위에 서면 내 체력이 다할만큼 뛸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게 꼭 고되지만은 않았다. 모르는 사람과 둘이 있는 일이 너무나 불편한 성격이 조금은 고쳐졌고,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도 의외로 즐거웠고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 이야기가 즐거웠다.


가장 흥미로운 일은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취객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잠이 부족해서 역삼동에서 인천 검암까지 가달라는 손님도 있었고, 그냥 차에 타면 된다는 연락을 받고 차에 타고보니 뒷좌석에 손님이 쓰러져 있던 일이 있었다.


어떤 연유에선지 고통스러워 보였고, 목적지는 부천에 있는 어느 대학병원 응급실이었다. 너무 아파 보여 말을 걸 수도 없었는데, 정상적으로 운행하는 것이 좋은지, 조금 무리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이동하는 것이 좋은지 여쭈었는데 후자가 좋다고 해 최선을 다했다.


그 손님을 내려드리고 처음 가본 부천이라는 동네에서, 대충 지도를 보고 유흥가처럼 보이는 곳을 헤매는데 콜은 더이상 오지 않고 날씨는 얼마나 많이 추웠는지 불 꺼진 꼬마빌딩 3층에 올라서 휴대폰을 뚫어지게 보는데 그래도 추웠다. 딱 영하 15도인 오늘 날씨 같았따.


두어시간을 기다렸으나 결국 서울로 오는 손님을 찾지 못해서 서울로 걸어 오는데.. 추운 날씨라 그런지 유난히 빛나던 그 서울답지 않은 별들을 그 날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서울이 아니라 그랬을까? 부천에 가면 볼 수 있을까?


이 세 가지가 모두 하루에 있었던 일이다. 그만큼 여의도 섬 바깥의 세상에서 더욱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생에 가장 아름다운 별을 본 대가로, 부천에서 서울까지 걷는 고통을 겪은 후론 웬만해선 경기도로 가지 않았다. 대신 퇴근길은 돌고 돌아 결국 강남에서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강남에서 빈 손으로 돌아온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별점'이 그저 잼있었다. 시절이 더욱 심각해졌는지 별점 하나로 행해지는 '폭탄테러'가 무섭다는 조사장님도 보았고, 별점 하나 차이로 콜이 주어지는 속도가 차이 나는 것 같다는 김기사님도 보아서 별점이 잼있었다는 말조차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그때가 참 세상이 말랑말랑해보이던 유일한 때가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잠시 만난 사람들이 평가한 나의 모습을 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그 인턴 시절에는 국민대표기관인 의원님 무서운 줄 모르고 감히 겁도 없이 대들기도 참 많이 대들었는데, 그때 의원님께 대들던 철없던 내 객기에는 그 별점도 분명 기여를 했다.


인턴 시절 나의 의원님은 유난히 나를 편하게 여기셨는지 오직 나에게만 짜증이 심하셨는데, 그 짜증에 맞선 나의 마지막 승부수는 "의원님이 내가 그렇게 맘에 안 들면 나는 대리운전 하고 살면 된다"는 말이었을 정도이니.. (그럼 그 분은 "OO가 참 잘 하고 있어. 근데 요즘 ~~ 때문에 많이 힘들구나. 잘 하고 있으니 걱정마!"라는 말도 안되는 대응을 해주셨는데도 나는 당시에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분과의 전설 같은 논쟁은 추후에 틈틈이 언급이 될 것 같다. 이부자리가 아니어도 이불킥이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지금도 그 분을 만나면 그때의 수많은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모르겠고 고개를 못 들긴 해도 지난 일이라 추억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일들이다.




그저 젊음 하나만으로 들이댈 수 있던 그때와 달리 이제 국회 인턴은 '보통의 인턴'이 아닌 거 같다. 월급은 대략 200만원 가까이 왔다는 현실은 다행이지만, 200만원 월급으로 시골 출신이, 부모 도움 없이 서울에서 자리 잡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된 거 같다. 인턴이나 사회초년생이 그 정도 월급이면 또 적지 않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고, 모든  직업이 또 다 그런것도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국회는 법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의원이 맘 먹으면 필기시험은커녕 면접조차 안 보고 채용되는 것도 가능한 바닥이라 그런지 지역유지 자녀의 채용이 어떤 직역보다 쉽다.


지역유지의 아들딸들의 자리는 더욱 넓어진 거 같다는 푸념도 들리는데 단지 기분 탓일까? 한편으로는 지역유지의 아들딸들이 국회 보좌진으로 채용되더라도 지역유지의 아들딸이란 브랜드 하나로만 버티기엔 점점 척박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처럼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 독립생계를 구성하며 국회 인턴으로 시작하여 보좌진으로 사는 케이스는 더 찾아보기 힘든 거 같다.


괜히 '공정'이라는 키워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국회는 어떤 조직보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었으면 좋겠다. 국회는 대의기구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는 만큼 다양한 시민을 대변하고 다양한 의사가 오갈 수 있다.


그런 대의기구에 지역유지의 자녀들이 가득하고, 인턴질이라도 하려면 최소한 평범한 집안의 자녀 이상이어야 가능하다면 그건 뭔가 출발부터 어색한 일이다. '라떼'를 떠올리다가 이말 저말 새고 말았던 오늘 내 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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