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의도비주류 Jun 15. 2023

어느 크리스마스의 술주정

국회의원 집에 쳐들어간 인턴비서의 최후

국회에는 떠도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

엄청난 일도 있고 어쩌면 사소한 일도 있는데,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며 쌍욕을 해대는 의원의 가르침(?)과 부당한 대우에 지쳐

마포대교 한 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의원에게 "야이 XX야. 니가 운전 해라" 며 차키를 푸른 한강물에 던지며 참된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는 모 수행비서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국무총리까지 한 L이었는지, 실세 장관이던 C였는지, 아니면 또 누구였는지 소문마다 다르다. 그 다리가 서강대교였는지 마포대교였는지 달라지기도 한다.






희한한 일도 많고 헛소문도 많은 여의도에선 사실이든 아니든 부풀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흘의 짧은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 출근을 하려는데, 주차장 등록은 물론이고 사무실 출입카드까지 해지당한 것을 알고 본인의 해고 사실을 안 보좌관 이야기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나는 그 보좌관이 누군지 모르지만 어느 의원실 이야기인지는 안다.


(비슷한 이야기가 드라마 보좌관에서 나오는데, 한태준 보좌관(이정재  粉)은 출근하는 길 출입게이트에 출입증을 찍다가 본인의 해고 사실을 알게 된다.)













잦은 악평으로 저녁 자리에 안주로 자주 오르내리는 의원이 있는 것처럼, 유명한 보좌진들도 있다.


어떤 보좌진이 헬기를 보유한 피감기관에 헬기를 태워달라고 요구하는 걸 직접 보기도 했고,

어느 무리의 인턴들이 저녁 자리를 만들고 피감기관 대관담당자에게 술값을 계산하라고 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어느 보좌진이 모 공단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료를 내놓으라고 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어차피 대부분 소문이라 사실관계 확인은 어렵지만, 가끔 기사화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분으로서, 본인 의원의 페북에 비판 댓글이 올라오자 중학생인 작성자에게 전화를 걸어 "죽을래? 살래?" 등등 한 비서가 있다.


모 기관에 다니며 나보다 직급도 경력도 월급도 체중도 2배나 많은 친구 성곰이 만취해 "대통령! 화이팅"이라고 외쳐도 보도되지 않겠지만, 내가 국훠 잔디밭 한가운데서 "여사님! 화이팅"이라고 외치면 보도 될 가능성이 크다. 기사제목도 바로 떠오른다.


(보좌진이라는 직업이 괴로운 첫 번째 이유는 '사장을 매일 보는 직업'이기 때문이고,

보좌진이라는 직업이 무서운 첫 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일로도 언론 보도에 오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또 다른 믿기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길었다.


어느 인턴이 크리스마스 밤에 술 취해 국회의원 집에 쳐들어가서 술 먹자고 한 이야기이다.


심지어 그 의원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술 먹자 하는 거랑 술 싫어하는 사람에게 술 먹자고 하는 거는 차원이 다른데, 근데 사장이거나 국회의원이면 더 다르다





시작은 소소했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인턴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국회 출신 지인들과 술을 먹고 있었다.

마침 그날 모인 자리에 있던 사람은 19대 국회 유명한 C의원과 L의원 보좌진 출신이 있는 자리였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면 결국 자기 처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인지상정이다.

의원들은 의원들끼리 모이면 보좌진 이야길 하기도 하고,

보좌진들은 보좌진끼리 모여 의원 이야길 하는 건 참 자연스럽다.


그날도 한 인턴이 보좌진들 몇몇을 만나서

"직업의 귀천은 없지만, 굳이 꼽는다면 가장 최악의 직업은?"

"사장을 매일 보는 직업이지!"

라는 식의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필 상대는 국회에서 보좌진에 대한 심히 부당한 대우로 유명한 C의원과 L의원이 아니던가.


그 자리에서 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던 인턴은 속으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나보다.

'아~ 역시 우리 의원이 최고야!'





그렇게 술시가 지나고 해시도 지나 자정이 가까워져 각자 집으로 갈 시간이 되어 술집을 나서는데 인턴의 눈에 의원의 불켜진 원룸방이 보였다. (마침 공교롭게도 그 인턴은 입사 전부터 의원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날 술을 먹은 술집은 의원 집에서 불과 50미터도 안될 정도로 이웃사촌이었다.)


시골에서 갓 올라와 국회가 뭔지도 모르면서 좋다고 국회의원을 따라다니던 그 인턴이라고 애환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C의원과 L의원의 악행을 들으며 의원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만 가던 중이었다.


속절없게도 시간이 지날 수록  취기는 커져만 가고, 의원에게 가끔 품던 작은 원망이 죄송스럽고 여기에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에 의원이 혼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안타까움까지 겹쳐지며 의원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서 캔맥주 2개와 천하장사 소시지 2개를 샀다.





















띵동~ 벨은 눌러졌다!


국회 의원실 300개가 모두 제각각인 것처럼 인턴에 대한 처우나 역할도 제각각이지만, 처우고 역할이고 무엇이든간에 자정 넘어 의원 집에 인턴이 간다는 것은 어느 의원실이나 공통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일 것이고, 그 야심한 시간에 1-2살 많은 형 집에 찾아가는 것도 정상적인 12년 간의 초중등교육을 통해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인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진대 국회의원 집에 찾아간다는 건 의원이 '쭉빵'을 날렸어도 여론이 반 가까이 나뉠 일이다.



한밤중에 사원이 회사 대표 집에 찾아가 "사장 나와!"라고 말한 것과 거의 느낌적인 느낌이 비슷했다.

일단 벨은 눌러졌다.



"누구세요~?"

인터폰을 통해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원님! OO입니다."

말없이 현관문이 열렸다.


6층 현관 앞에서 다시 벨을 누르니 의원이 문을 살짝 열며 의아해하며 물었다.

"OO! 무슨 일 있어?"


인턴이 캔맥주와 천하장사가 든 소시지를 흔들며 답했다.

"아~ 의원님 같이 맥주 한잔 하고 싶어서 왔어요!"


심지어 그 의원은 술도 좋아하지 않고, 술자리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런 의원에게 밤12시가 다 된 시간에 술을 먹자고 했으니 대답은 당연했다.

"지금 안 먹고 싶은...."


의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이~ 의원님 크리스마스인데 이렇게 혼자 계시면 어떡해요? 너무 맘이 아파서.."


그 인턴은 이때부터 중간중간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식탁도 없는 원룸 방바닥에서 맥주캔은 뜯어졌고 의원과 술을 시작했다.

맥주 1캔씩 먹어봐야 몇 분이었을까?

거기에서 끝났어도 차라리 해피엔딩이었을뻔 했다.



희한하게도 맥주를 꿀꺽꿀꺽 반캔 조금 넘게 먹었을 무렵 잠시 정신이 돌아왔는데,

그때 든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아! 아까 의원님이 술 먹기 싫다고 했는데, 내가 시간을 더 뺐어야 되겠어? 내가 얼른 먹고 가야지!"라고 생각을 하고 남은 술을 마시고는 거의  정신을 잃고 집으로 왔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불행하게도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이불킥부터 시작되었다.

출근은 해야 하는데,  출근을 하기도 싫고 출근을 해도 되는지도 모르겟다 싶었다.

일단 몸을 일으켜 지하철까지 탔는데, 출근해서 어떻게 의원을 마주해야 하는지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출근을 해 사무실 의자에 일단 앉아 보니, 처음이자 마지막 소개팅을 갔던 그날마냥  출입문에 인기척만 들려도 ‘의원인가 보좌관인가 의원인가 비서관인가’ 긴장하길 몇 번만에 의원이 들어와서는 평소처럼 인사를 받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인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데,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며칠이 흘러갔다.

마음에 품은 불안감과 회한이 '에이 몰라 씨'라는 체념으로 바뀔 무렵까지 의원은 한 마디도 없었도 한참 지나 그저 소문만 들려왔다.


의원이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자식이 말야. 갑자기 찾아와서는 술을 먹자고 한 건 좋아!

근데 잘 먹다가 이 자식이 지 술 다 먹었다고, 내 술 남은 걸 원샷하더니 말도 없이 가 버리더라고. 허~참!




소문 치고 자세히 아는 건 그 인턴이 여전히 국회에 있기 때문이고,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도 그 인턴이 '나' 라서다..............ㅠㅠ



참 철이 없던 시절이다.

소문이 난 이야기가 저 정도이지 불만이 있으면 의원에게 털어야 풀리고, '내가 그렇게 싫으냐?' 투덜거리고 단톡방을 나가버려 의원이 직접 다시 초대하기도 했고, 의원이랑 둘이 밥 먹을 때 재미없다고 휴대폰만 보다가 이런 얘기도 자주 들었다.


"너는 왜 맨날 휴대폰만 보냐. 나랑 밥 먹으면서 휴대폰 보는 건 OO (아들 이름)이랑 너밖에 없어!"



의원과 의원실 제대로 만났으면 그냥 국회 생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들이었는데 운좋게 살아남아서 아직 국회에 있다.


갑자기 짤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을 벌이고도 다행스럽게도 이 의원님을 꽤 오래 모신 후 다른 의원실로 옮겨 갔다.






다른 의원실에서 일을 하는 지금도 같은 상임위에서 다시 자주 마주치게 되었지만 아직도 고개를 못 들겠다.


엘베나 회의장에서 마주쳐도 눈을 마주치기 어려운 나에게 그 의원이 "OO, 잘 하고 있지?"라고 물어주고,

지역 보좌관께는 "OO가 그 방 일 다하는 것 같다!"라고 내 안부를 전해주곤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느 크리스마스의 술주정은 짧았으나, 그 끝은 계속되고 있다.

쪽팔림은 평생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턴의 대리운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