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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Feb 05. 2023

위험해 보이는데

밤새 텐트를 휘몰아 흔들던 눈바람이 그친 듯했다. 고요한 정적이 얼마쯤 흘렀을까? 뿌연 여명이 스며들었다. 스며든 여명은 한기를 흩트렸다. 남자는 그녀가 생각났고 눈물이 났다. 그립고 보고 싶었다. 남자는 상실을 경험했다. 앞으로도 또 다른 형태의 상실과 비탄을 경험할 것을 알고 있다. 남자는 뜨거운 차를 마시며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젠 이곳에 흩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삼 년 전이었다. 남자는 텐트를 짊어지고 지리산에 올라섰다. 첫눈이 큰 눈이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방한용 장비는 다 챙겼으니 추위는 두렵지 않았다. 충전재가 1,500그램 이상 꽉 찬 한 겨울용 침낭도 갖추었다. 하지만 눈바람이 몰아칠 때 필요한 장비는 없었다. 하산하는 것이 맞았지만 남자는 하산하지 않았다. 하산하기엔 억울했다. 남자는 지리산행을 위해 휴가를 냈다. 상사가 그를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직장생활 길게 하려면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했다. 귓등으로 넘겼지만 내내 찝찝했다. 구례행 무궁화열차도 가까스로 탔다. 용산역에서 가장 빠른 열차표를 요구했을 때 역무원은 표를 내주지 않았다. 지금 뛰어도 못 탄다고 했다. 무조건 달라했고 건네받은 차표를 가지고 냅다 뛰었다. 택시기사의 투덜거림은 구례역에서 하동바위 입구까지 쉼이 없었다. 이제까지 들인 공이 아까워서 이렇게 물러설 순 없었다.     


남자는 노을 질 무렵 계곡 밑 아늑한 곳에 텐트를 설치하고 씻기 위해 냇가로 나갔다. 노을빛은 절벽 중간에 걸려있었다. 빛 사이로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위태롭게 흔들리는 여자가 보였다. 

“거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으세요?”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노을만 바라보았다. 여자도 계곡 밑에 텐트를 설치했고 밤새 그들은 암벽등반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암벽등반을 해 본 후에도 여전히 위험하다고 주장하면 자신이 등반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남자는 기꺼이 응했고 이후 그들은 봄, 여름, 가을엔 암벽을 겨울엔 빙벽을 등반하게 되었다.     


일 년 전이었다. 남자는 빙벽등반을 했고 첫 번째 고리를 채 걸기 전에 5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다. 중간에 둔덕이 있어 추락이 멈추는 듯했지만 균형을 잃은 몸은 다시 추락을 시작했다. 의사는 보름 정도 절대 움직이지 말라 했다. 여자의 집에서 여자가 남자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남자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여자는 남자의 곁을 떠났다. 여자는 모진 말이나 불안한 눈빛조차 없이 시린 겨울을 더듬어 떠났다.    

  

남자는 여자와 다녔던 산행길을 더듬어 걸었다. 어제 그녀와 처음 만났던 지리산 계곡에 텐트를 쳤다. 그녀가 떠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몸이 사라지듯 기억도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노을빛이 절벽 중간에 걸쳐 있었다. 노을빛에 그녀가 보이는 듯했다. 남자는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리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내 노을이 지고 계곡엔 밤새 눈바람이 휘몰아쳐 텐트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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