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끈 힘이 들어가곤 했어

by 정재환

여자가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는 사이 남편은 미역국의 간을 보고 밥상을 차렸다.

첫째는 가족 채팅방에 새벽까지 논문 쓰다 잠들었다고 깨우지 말라 했다. 첫째는 논문심사를 앞두고 있어 맘고생이 심하다. 잠 못 들고 거실을 서성대다 새벽녘에 얼핏 잠들거나 꼬박 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마음 근심과는 달리 몸무게는 늘고 얼굴엔 기름기가 돌았다. 고민은 깊어지고 상황은 심각한데 형식은 따라주질 않으니, 첫째의 속은 두 배로 상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가족들은 난감했다. 여자가 교수 친구한테 물어보니 첫 논문 쓸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다며 다독여주라 했다. 그리 말하는 친구도 제자들을 쥐잡듯 힘들게 할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논문이 뭐라고 머리 싸매고 힘들어하나. 오래전 교수가 된 친구의 논문을 여자는 라면받침으로 쓰고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뀐 둘째는 깨워도 안 일어날 듯했다. 그래도 깨워 보라고 여자는 남편을 채근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둘째는 밥만 먹고 다시 자겠다는 조건으로 일어났다. 둘째는 웹디자인을 한다고 몸고생이 심하다. 원래는 상하차 아르바이트해서 돈 한번 땡겨 보겠다고 각오가 대단했는데 운동하다 손목을 다쳤다. 상하차 대신 돈은 안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다며 웹디자인을 시작했다. 둘째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동영상 편집을 했다. 학교 조별 과제였는데 영상미가 뛰어나 둘째 본인도 놀랐다. 최근 창업대회에 나가면서 웹디자인을 맡았는데 잊었던 재능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작업은 밤에 시작되어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여자는 둘째의 작업방식에 너그러웠다. 좀 더 나은 성장을 위해선 때론 잔소리 훈육을 고집하던 여자였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낮, 밤이 바뀐들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머스크는 참 멋진 사람이야.”

깨작거리던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둘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페이팔 팔아서 전기차 만들고 이젠 화성 가려고 우주선 만들고. 괴팍하지만 천재잖아.”

남편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저번엔 빌 게이츠가 휼륭하다고 하더니 이번엔 머스크야?”

라며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참 훌륭하지. 직원의 절반 이상을 한꺼번에 해고하고 요란한 관심을 원하고 자신을 지구를 구원할 영웅쯤으로 여기는 광인이지.”

남편은 못마땅하면 말하면서 자가 발전하여 의미를 부풀린다. 논리적이지만 말이 많아지고, 합리적이지만 거칠어진다. 흥분은 확장되고 단정된다.

“가진 자들이 누리는 부유함이 어디서부터 왔을까? 밤낮없이 일한 노동자의 피땀을 그들이 편취(騙取)한 거야.”

여자는 혼자 열에 들떠 아이를 몰아대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남편은 모른다. 계단에서 자고있는 그를 들춰업고 비틀거리며 소파까지 옮긴 이가 아이란 것을. 여자가 국을 끓이는 동안 남편에게 이불을 덮어 준 이가 둘째인 것을 알지 못한다. 아이가 잠든 남편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는 것도.

여자는 둘째가 자기감정에 충실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숨기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 아이. 아이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도둑질로 남의 것을 빼앗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폭력을 사용해 이웃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십대의 나이에 돈 많은 자가 부러운 것이 그리 비난받을 일인가? 아이가 가진 자들의 기묘하고 이상한 행실들을 분별하고 판단하며 알아야 하는가?

여자의 어릴 적 장래 희망은 어른이 되는 거였다. 어서 세월이 흘러 빨리 어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른이 갖는 권력이 부러웠다. 어른이 되면 그 지긋지긋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다 하며 살 수 있다고. 땀흘려 일해야 간신히 먹고, 입을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남편이나 아이나 설득 능력도, 끈기있는 접근성도 부족했다. 마음속엔 빗장을 단단하게 걸어둔 채 조금도 열어 보이려 하지 않았다. 논쟁은 소모적이었을 뿐 아니라 혐오나 실망으로 치달을 것이 뻔했다. 여자가 한숨을 내뱉으며 진화에 나섰다.

“엄마가 젊었을 땐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마구 떨리고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곤 했어. 참 좋았던 시절이야. 아빠는 아직도 그 시절이 그리운가 봐.”

여자가 남편에게 그만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남편의 말이 더 길어지면 아이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다. 출근 시간에도 쫓길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각해선 안 된다. 5분, 10분 늦어지는 직원들의 출근시간이 안되겠다 싶어 어제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 그리 말해놓고 내가 늦으면 얼마나 뻘쭘할까. 상상만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둘째 역시 이쯤에서 이야기를 접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 말을 돌렸다.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네. 엄마는 해산물 좋아하잖아.”

여자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여자의 쉰여덟 번째 생일 아침이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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