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정문 맞은 편 문방구를 거쳐 길을 건너야 한다. 문방구 앞에 못미쳐 사거리 신호등이 초록색이 되면 여자는 뛰지 않는다. 그녀의 전력 질주로 건널 수 있는 거리가 아님을 몇 번의 시행착오로 깨쳤다. 대신 걸음걸이를 늦추고 다음 신호까지 학교 앞 풍경을 빠르게 훑는다. 한 아이가 엄마의 손을 놓지 않고 학교에 들어가기 싫어 뒷걸음을 친다. 학교 보안관이 다가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타이르지만 소용없다. 아이의 엄마는 출근길인 듯 초조하게 시계를 힐끗 본다. 얼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야 출근할 수 있을 텐데. 바라보는 여자의 마음도 다급해진다. 그때 아이의 친구가 왔다. 친구가 반갑게 인사하며 손 내밀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성큼 학교 안으로 걸어간다. 친구 손을 꽉 잡은 채로. 저 어린 것도 서로 의지하는 것을 배웠네. 기특하네.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버스 안은 붐볐다. 체면이나 예의는 뒷전이었다. 간밤의 휴식으로는 부족했는지 피로가 가시지 않은 얼굴들이다. 조건이나 상황이 악화되면 이기심이 강화되고 신경질적이 된다. 제한된 자원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려면 물질과 권력을 향한 탐심을 거두어야 하는데. 우린 왜 이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이어졌다.
가진 자들의 편취(騙取)라는 남편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그 단어를 잊지 않고 있었네. 학창시절 여자가 마르고 닳도록 썼던 말이다. 맞아 내가 자주 쓰던 말이었지. 달리 뭘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명쾌한 개념이었어. 착취, 억압 같은 원색적 표현이 아님에도 더 생생한 의미로 다가오던 그 말.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표현이었어.
여자의 서사는 이랬다. 그녀가 대학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갈 때의 마음가짐은 자부심과 자아도취였다. 애초에 원하던 대학 같은 것은 없었다. 학력고사 성적대로 맞춰 어디든 입학할 생각이었다. 일류대학에 지원하진 못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얻은 결과에 만족하며 합격의 기쁨을 흔쾌히 누리고 싶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르며 말했다. 그래 난 마땅히 이 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이건 내가 죽도록 노력해서 이룬 성과이고 결실의 기쁨은 오롯이 내 것이야. 시샘하는 액운이 있다면 그녀는 당당히 맞설 각오였다. 등록금 걱정도 나중에 하리라. 여자는 황홀경에 빠져 학교를 천천히 음미하듯 돌아보았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엔 학자추(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강의실 창문을 깨고 밧줄을 타고 내려와 광장에서 출범했다. 그 전 해에는 전투경찰과 사복경찰들이 교내에 상주하며 물밀듯 몰려와 시위 학생들을 쥐잡듯이 검거했지만, 그녀가 입학한 해엔 학원자율화를 추진한다며 철수했다. 대신 학교 밖으로의 진출은 한 발짝도 허용되지 않았다. 최루탄이 날아오르고 페퍼포그차량에선 매운 최루가스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학교는 학교가 승인한 학도호국단을 부정하고 학생들의 투표로 총학생회를 구성하자는 학자추를 인정하지 않았다. 급기야 총장실이 점거되면서 학교는 휴강을 발표했다. 여자는 학교 행정실에 가서 왜 휴강을 하냐고 따졌다. 학생들이 데모 좀 한다고 매번 휴강을 하면 공부는 언제 할 거냐? 천금같은 내 등록금을 돌려달라 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울 엄마가 시장에서 좌판놓고 뼈빠지게 고생해서 번 돈이라며 당장 휴강을 철회하라 했다. 여자는 혹여 휴강 때문에 졸업 시기가 늦춰질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음 해엔 삼민투(민족해방 민주쟁취 민중해방투쟁위원회)가 강의실 창문을 깨고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광장은 삼민광장이 되었다. 여자는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만 했다.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엄마의 좌판행상으론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사촌 언니에게 공장에서 일하며 번 돈까지 빌려야 했다. 내가 졸업하고 취직만 되면 바로 갚을게. 고마워. 언니. 여자는 역사의 고통에 눈 감았고 자신의 안위와 이익에만 집착했다. 여자는 남아 있는 수많은 날들을 높은 사회적 지위와 존경받는 위치에서 지내고 싶었다. 이제까지 불철주야 쏟아부은 노력과 열정이면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자신했다.
나서서 될 일이 있고 아무리 나서도 안될 일이 있다. 여자가 보기에 민주화 시위가 딱 그랬다. 의지와 신념이란 것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필멸의 존재들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아우성칠 뿐이다. 여자는 체념과 순응을 통해 편익을 얻고 싶었다. 그 길은 쉽고 가벼웠으며 단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