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언니와 헤어진 여자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학교로 향했다. 얕은 오르막길을 따라 솔밭이 이어졌고 중앙에 있는 농구장에선 고등학생인 듯한 아이들이 런닝셔츠만 입고 농구를 하고 있었다. 학교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처음 본 듯 생경했다. 학생회관 2층 계단 좌측에 있는 동아리 방 앞에서 심호흡을 한 후 노크를 했다.
“저, 동아리 가입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여자가 찾은 동아리 방은 현대문학반이었다. 현대문학을 비평한다는 취지와는 다르게 이념 서적을 읽고, 화염병을 제조하며 시위에 앞장서는 선봉대였다. 방 안에 있던 누구도 대답하지 않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책 읽고 토론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와중에 아는 얼굴이 보였다. 과 모임에서 가끔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하며 지나쳤던 과 동기였다. 데면데면한 사이여서 개인적인 관심이나 교류는 없었다. 다만 동기 중 유달리 과묵하고 냉소적이어서 눈여겨봤었다. 여자가 망설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 덕주 아냐?”
덕주가 일어나 여자를 데리고 학생회관 1층 식당으로 갔다.
“밥 먹었어? 난 식전인데 밥 같이 먹으며 얘기할까?”
덕주가 주문하러 간 사이 여자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어떻게 말할까 고민했다.
“순영아, 방학인데 일부러 학교에 나와서 동아리방을 불쑥 찾아온 이유가 뭐냐?”
여자는 비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자는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했지만 덕주의 냉소적 성격을 감안하며 호흡을 골랐다.
“나한테 개인학습을 시켜줄래?”
덕주는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탁자 밑을 내려다보며 눈앞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을 추스르는 눈치였다.
“왜?”
덕주가 애써 고른 단어였지만 너무 짧고 단호해서 여자를 당황하게 했다. 덕주 역시 후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말주변 부족한 것을 곱씹는 듯 덕주의 얼굴이 굳어 보였다.
“학습 내용과 계획은 네가 짜고 난 무조건 따를게. 대신 진도는 좀 빨랐으면 좋겠어.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고 토론하는 정도면 좋겠어.”
여자는 변심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모색과 실천을 원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후회할 수도 있어. 앞으로 가질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을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얘기야?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가? 이젠 헛꿈 안 꿔.”
덕주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여자의 눈빛이 궁금했지만, 선약이 있어 자리를 정리해야 했다.
“담주까지 이 책 읽고 내용 정리해서 와.”
덕주는 논리적 사고를 중시했지만, 이번은 직감에 맡기기로 했다. 나쁘지 않은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훗날 웃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