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칙

by 정재환

“오늘 오후 2시부터 20분간 적의 공습에 대비해 민방위 훈련이 전국적으로 실시됩니다. 훈련은 오후 2시부터 훈련 공습경보 발령으로 시작되어... ”

여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민방위 훈련 안내 멘트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이미 벗어났다. 한 정거장을 지나쳐 내린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바삐 걸었다. 서두른 덕분인지 예상과 달리 약간의 시간 여유마저 있었다. 센터 주차장을 먼저 살폈다. 수현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차 안을 살폈다. 차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수현은 상습적으로 지각을 했다. 처음엔 초등학생 뒷바라지 때문에 늦는 줄 알았다. 동거하는 남자가 다소 긴 지방 출장을 가면서 남자가 담당하던 아들 등교 수발을 수현이 했다. 좀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동거남이 아들 등교 뒷바라지에 복귀했는데도 수현은 상습적으로 지각했다. 주차시켜 놓은 차에서 한가하게 앉아 있다 9시가 넘어서야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커피를 한잔 마셔야 했고 이후에는 먼 산을 바라보며 넋놓고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팀장의 지적에도 보란 듯이 지각을 했다. 근무태도에도 변화가 없었다. 팀장은 여자에게 수현의 징계를 요청했다.

어제 싫은 소리를 한 탓인지 지각한 직원은 없었다. 여자는 습관적으로 수현의 자리를 먼저 살폈다. 수현이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신 사무실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6개월 전에는 지각한 사람이 커피를 사 오기로 벌칙을 정했다. 효과가 있었다. 직원들은 지각하지 않기 위해 숨이 넘어갈 정도로 헐떡이며 뛰어왔다. 생활임금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의 급여로 12잔의 커피 값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약간의 부담감으로 지각을 막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엄청난 부담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그것도 한참 지나 직원 면담 때 알게 됐다.

“관장님, 우리가 늦고 싶어서, 게을러서 늦는 것이 아닌 것은 아시지요? 애들이 어려서 치다꺼리하다 보면 얼굴에 분칠 한번 못하고 매일 뛰다시피 출근하잖아요. 관장님도 애 키워봐서 아시잖아요. 커피 12잔 값이면 하루 일당의 반이 날라가요. 지각하면 차라리 야근이나 휴일 출근을 할 테니 커피 내기는 그만해요.”

연말 직원 면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쏟아내기 위해선 결의가 필요했으리라. 떨림을 참고 입술을 앙다문 모습은 여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안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금전적 부담이 있는 벌칙은 없애겠습니다.”

커피 내기 벌칙이 없어지면서 다시 지각이 시작되었다. 어제도 참 많이 참았다. 심지어 조금 일찍 온 직원한테 뭐가 그리 좋아 일찍 오냐며 눈을 흘기는 직원도 있었다. 5분 정도 늦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아주 많이’ 늦은 직원이 왜 이리 차가 막히는 거야라며 미안한 기색조차 없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뻘쭘해서 하는 소리겠지 하며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말하면서 흥분하여 증폭되는 스타일이 아니다. 냉정하며 정나미 떨어질 정도로 따져 들어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설득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괜히 지적질했나 싶었지만 여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직장생활 편하자면 끝도 없어, 좋은 게 옳은 건 아냐, 직장도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는 거야, 윗사람 눈치보는 건 비겁하다면서 직원들 눈치 보는 것은 정당한 건가, 여자는 약해지는 맘을 다잡고 결재 서류를 펼쳤다.

이전 06화모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