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공간 채우기

by 정재환

‘옥상에서 잠깐 볼까?’

여자는 수현에게 문자를 보내며 입술을 질끈 씹었다. 오늘 중으로 반드시 마무리지어야지 다짐하며 출근했지만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망설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내일로 미루면 또 미루게 된다. 망설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수현아 너 정신 바짝 차려. 나라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는다. 도박하는 그런 놈하고 계속 살 이유가 하나도 없어. 빨리 정리하는 게 최상책이야. 응? 내 말 알아들어?”

옥상에 올라온 수현에게 여자는 다짜고짜 퍼부었다.

여자의 전(前) 남편도 그랬다. 여자에겐 대학 시절부터 사귀었던 연인이 있었다. 여자의 부모는 완강히 반대했다. 여자의 연인은 가난했고 그의 꿈도 가난해 보였다. 민주화 투쟁으로 감옥에 갔다 왔고 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여자는 부모의 완강함을 이겨내지 못했고 연인의 곁에 머물지도 못했다. 오래 깊이 사귀었던 여자의 연인은 여자의 얕음을 견뎌내지 못했다. 연인은 흔적이나 자취를 남기지 않고 여자에게서 떠났다.

여자의 부모가 맺어준 인연은 다행스럽지 않았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가 지속되었다. 살다 보면 살아지겠지. 라며 살았다. 여자의 남편은 도박과 술에 의지했다. 여자의 한숨은 깊어졌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은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왔다. 시린 겨울 어느 날. 여자의 옛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겨울 외투를 입은 그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고민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온갖 유산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다른 세상에 속하고 싶었다. 짊어진 무게가 버거워 더 버텨낼 수 없었다. 여자에게 부과된 책임에 대해 더 이상 성실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자는 이혼에 반대하는 부모에게 절규했다. 엄마한테 상의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아빠의 의견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내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냥 내 얘기를 들어달라는 거예요. 나한테 보물이 있다고 얘기하잖아요. 근데 왜 보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저 흙탕물일 뿐이라고? 그것 때문에 내가 더러워질 뿐이라고? 차가운 대기 속에서 정전기를 일으킨 내 연인의 머리카락이 보였어요. 그가 환하게 미소 지었어요.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만져보았어요. 그의 얼굴이 내게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그의 숨결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니까요. 그런데 왜 그게 보물이 아니에요? 그게 왜 지옥문입니까? 내 삶에 처음으로 기쁨이 돼 준 사람이 왜 지옥이냐구요?”

여자의 절규는 애처롭고 슬펐다. 이전의 삶과 다른 시간이 필요했고 간절했다. 간절함은 하늘에 닿았고 그녀가 원하던 대로 그리되었다.

*


수현은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시간이 멈추고 소리가 사라지며 모든 사물이 정지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관장의 얼굴이 멈추어 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강사 둘이 종이컵에 든 믹스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수현을 훔쳐보고 있었던 듯했다.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시선은 수현을 향하고 있었다. 강사들은 센터 어디에도 쉴 곳이 없었다. 때론 빈 강의실을 이용해 잠시 쉬기도 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을 불편해했다. 수현은 여자 강사들에게만 옥상 자물쇠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비록 옥상이었지만 한여름에도 그늘막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흡연족은 두 배로 반겼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여자들이 내놓고 흡연하기에는 여전히 힘들고 불편한 세상이었다.

옥상 밑 지층엔 마을버스가 움직임을 멈추고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센터 앞이 회차 장소여서 버스들은 다음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움직임을 멈추고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버스 앞문 쪽에 기사 아저씨가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에겐 눈비를 피할 수 있는 한 평 공간이 제공되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도 제공되지 않아 기사들은 센터 화장실을 사용했다. 청소 아줌마가 불평을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관장이 화장실 개방을 고집했다. 기가 쎄고 할 말 못하면 병이 나는 청소 아줌마가 관장에게 따졌지만 소귀에 경읽기였다. 대신 화장실에 경고문 같은 협조문을 붙여놨다. ‘변기에 담배꽁초, 물휴지, 종이컵 같은 이물질을 넣지 마시오. 바닥에 두면 제가 치우겠습니다. 양심에 맞춰 바르게 삽시다.’ 센터 맞은편 아파트 놀이터에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수현은 자신의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동거남의 껌딱지였다. 물고 빨고 떨어지질 않는다. 아들은 수현과 사는 게 아니라 동거남과 사는 거였다. 동거남의 빈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수현은 관장에게 끝내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동거남이 도박한다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고 거짓이기도 했다. 동거남이 도박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사실이다. 하지만 수현은 동거남이 도박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집에 늦거나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있었지만 도박한 게 아니다. 그는 다시 떠돌았다. 허전해서. 견딜 수 없어서. 텅 빈 공간을 채우려고 그는 다시 떠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는 고통이 따랐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어. 라고 이별 통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현에게 너무 잔인하기에. 그래서 도박 운운하는 것이다. 만약 동거남이 도박한다면 아무리 그리워도 한줌의 미련없이 떠나보낼 수 있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 실망도 크니까. 관장 말대로 하루빨리 정리할 수 있다. 그의 몇 안 되는 짐 정도는 집 바깥에 내놓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말하지 않을 뿐이다. 다시 숨이 막혀왔다.


수현은 옥상에서 내려오면서 관장과 자신은 같은 곳에 닿아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다. 다만 관장은 단호하게 풍랑을 헤쳐나갔지만 자신은 풍랑 속에 갇혀 있다. 아니 풍랑으로 인해 침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장이 밧줄을 던져주며 이리 나오라 하지만 수현은 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 모든 것이 있다. 이걸 두고 어딜 나가서 무슨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수현은 관장에게 줄 생일 케이크를 꺼냈다. 팀장이 관장과 잠시 말을 나누는 사이에 생일축하준비를 하기로 했다. 작은 현수막을 제작하면 깔끔하고 멋스러울 텐데 돈 드는 일 했다고 관장이 싫어할까 봐 복사 용지에 한 글자씩 글을 써서 붙였다. 카드 한 장에 직원들이 돌아가며 손 글씨로 축하 인사를 적었다. 꽃은 돈 드는 일이라 생략하기로 했다가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다시 쓸 수 있는 비누 꽃을 준비했다.

직원들에게 관장은 언니 같은 존재였다. 여자가 관장으로 부임하는 첫날 관장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직원 12명이 복작거리는 사무실 한복판에 자리를 마련했다. 다들 기함하며 관장실에 들어가시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우리는 한솥밥 먹는 식구인데 왜 떨어져 지내냐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관장실을 직원휴게실로 개조해서 직원들이 짬을 내어 쉴 수 있게 했다. 수현은 관장 책상 앞에 가림막을 설치했다. 관장의 사적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어서였다. 관장이 반대할 것 같아 직원들이 어려워서 설치하겠다고 둘러댔다.

옥상에서 내려온 여자는 크게 기뻐했다. 기대도 내색도 하지 않았는데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직원들이 적은 축하의 편지를 받아 들었을 땐 눈물이 났다. 직원들이 없는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이 길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의 선량한 눈빛을 마주할 수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 광활한 우주에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이리 좋은 이웃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여자의 쉰여덟 번째 생일 오후는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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