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있어. 내려 오슈.”
정각 오후 6시. 여자의 퇴근 시간에 맞춰 덕주는 서둘러 움직였다. 덕주는 첫째 아이의 전화문자를 받고서야 오늘이 여자의 생일인 것을 알았다. 케이크와 꽃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같이 가서 맘에 드는 것으로 사면 되겠지 싶었다. 아이들한텐 카드를 사서 축하 편지를 써두라고 일렀다. 덕주는 성의 있게 긴 축하의 글을 따로 준비했다. 예전 같진 않지만, 여자는 덕주의 편지글을 좋아했다. 덕주의 편지글은 낯간지러운 미사여구와 무게감을 잔뜩 실은 진지함이 묘하게 어울렸다. 아엠유어맨으로 끝나는 마무리도 나쁘지 않았다.
“사내는 여자한테 딱 한 번만 화를 낼 수 있어. 사내가 저녁을 준비해. 시장에 가서 여자가 좋아하는 대구를 사고 싱싱한 미나리, 쑥갓, 콩나물과 무도 준비해. 사실 대구탕 맛을 결정하는 것은 해물이야. 해물을 따로 살 필욘 없어. 대구를 사면 약간의 해물을 덤으로 주거든. 그걸로도 충분해. 대구탕이 끓을 때쯤 여자가 좋아하는 샐러드를 하는 거야. 양상추와 피망, 견과류와 제철 과일을 조금 준비하지. 샐러드 먹을 때 바로 쓸 수 있게 발사믹 식초도 미리 준비해 두고. 입가심으로 사용할 달달한 아이스크림도 준비해야 해. 대구탕이 끓다가 졸여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어. 그래도 여자가 안 와. 전화도 없어. 전화를 해도 안 받아. 식사 때가 한참 지나서야 여자가 집에 와. 어쩌지. 자기야, 나 식사했는데. 친구가 갑자기 와서. 내가 사람 만날 땐 전화를 무음으로 해놓잖아. 미안해서 어쩌지? 이럴 때 비로소 사내가 화를 낼 수 있는 거지. 그것도 같이 사는 전 생애에 딱 한번 만.”
덕주의 너스레에 아이들은 싱겁게 웃고 만다.
정말 그랬다. 작은 일에도 배려와 관심을 보이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저녁을 준비하며 온갖 정성을 다 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시간은 관계를 느슨하게 했다. 느슨하니 편안했다. 많이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만치에서 손짓하던 둘의 낙원은 가도 가도 닿지 않았다. 비바람 거세도 지치지 않을 줄 알았다. 세상이 멀어져가도 서로 곁에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기대만 했지 내가 그리 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바빴으니까. 애들이 그냥 무럭무럭 크는 것이 아니니까. 맞벌이 하며 장보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다음 끼니는 뭘 먹지까지 걱정해야 하니까. 세상 모든 관계들이 가지는 양가성과 복잡성을 무리없이 풀어나가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니까.
“이번 주말이 엄마 생신이잖아. 그땐 귀찮게 집에서 하지 말고 밖에 나가 사 먹자.” 남은 생일 케이크를 보관용 그릇에 옮겨 담으며 여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준비할게. 대구탕과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아보카도 넣은 샐러드까지. 어때?”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예전처럼. 지치지 않고 정성껏 애정을 담아 보살피는 거야.
대륙의 중심부에서 생겨 나와 태평양 한복판까지의 경로를 지나야 하는 구름은 아파트 창밖을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의 쉰여덟 번째 생일 저녁도 구름 따라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