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한테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할까? 아냐. 도시락 싸오는 분들이 반 이상인데...’
창밖엔 바람이 불었다. 사무실엔 침묵이 가득했다. 여자의 눈치만 살피는 분위기가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풀어보려 했지만 서툴렀고 애써 꾸민 친절이 어색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첫째 딸아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엄마 오늘 저녁에 와인 한잔해요. 일찍 오세요.’
‘분위기 싸할 때 푸는 방법 있니?’
‘커피 돌려.’
‘널 낳은 건 내 행운이야.’
여자는 커피를 돌렸고, 몇몇 직원은 과할 정도의 감사함을 표했다. 아부성 발언인 줄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수현이 관장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수현은 공공일자리로 센터에 취업했다. 사회적 약자와의 동행 또는 자조·자립 기반의 일자리라는 행정적 이름 뒤에는 혜택을 주는 자의 거만함이 드러나 있었다. 혜택을 받으려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했다. 실업자 또는 정기적인 소득이 없는 일용근로자로서 가구소득이 80% 이하여야 했다. 가난한 돈에 존엄을 넘겨야 했다. 그나마 상하반기로 나뉘어 선발했기 때문에 보통은 취업 기간이 6개월에 불과했다. 관장으로 부임한 여자가 직원 서류를 보며 수현을 눈여겨 본 것은 당연했다. 이미 넉 달을 근무한 수현은 두 달 뒤엔 아마도 직장을 잃게 될 것이다. 근무 기간이 두 달 남은 수현에겐 정규직원을 보조하는 업무나 서류 정리 같은 단순한 일 또는 지속성 없는 잡일이 주어져야 했다. 하지만 여자는 임시직에도 일할 기회를 주었다. 수현에겐 강사를 섭외하고 관리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 했다. 수현은 의아했다. 두 달밖에 남지 않은 그녀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긴 것이 불만이면서도 제대로 된 일을 맡는 게 좋았다. 허드렛일만 시키고 소 닭 보듯 하던 동료 아닌 동료들이 싫었다. 아무런 소속감도 없이 겉돌았었다. 두 달이지만 이제 그녀도 센터의 일원이 된 것이다. 발령 난 지 한 달 뒤 센터에 채용공고가 붙었다. 강사 섭외 및 관리업무를 담당할 직원을 구한다는 구인공고였다. 여자는 수현을 불렀고 이번 채용모집에 신청해 보라고 권했다. 여자는 심사는 공정할 것이며 기존 직원에 대한 차별적 호의는 없을 거라고 덧붙였다. 수현은 엄정한 심사를 거쳐 정규직이 되었고 기존 업무 외에도 삼라만상의 모든 일을 맡게 되었다. 그때 수현은 이혼상태였는데 과중한 업무 때문에 외로움이나 인생의 허망함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여자가 3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 여부가 안개 속일 때 집으로 전화가 왔다.
“관장님, 저 수현입니다. 집 앞인데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로 술기운이 전해졌다. 혀가 말려 있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수화기 너머 수현의 모습을 상상했다.
“관장님 집 앞이라고요. 네? 아시겠어요?”
“바로 나갈게요. 잠시 기다려요.”
이미 취해 있는대도 수현은 굳이 술집으로 가자고 했다. 한편으론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야무지게 아니 매몰차게 야단을 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엔 수현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그래 한잔 마셔보자. 뭔지 들어나 보자. 별일 아니면 수현씬 내일 나한테 죽었어. 여자는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오기로 무장했다.
“관장님 제가 영악한 거 아세요?”
“아니. 영악한 거는 모르겠고 무모한 것은 알아.”
여자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술에 취했지만 수현이 예의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제가 우리 부모님 얘기 안 했지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부모라고 가끔 전화도 해요. 엄마가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저를 임신했어요. 아빠는 같은 반 친구였고요. 둘이 좋아 죽겠는데 양쪽 집안에선 난리가 났고. 나이 스물도 안 된 청춘들이 어쩌겠어요. 야단도 간섭도 싫고 학교도 싫어서 가출을 해서 저를 낳았대요. 돈이 떨어지면 분윳값이라도 벌려고 아빠는 공사장에 일용직으로 가서 하루 벌이하고 엄마는 식당 일하며 근근이 버티었다고 해요. 참 웃기지요? 그 어린 것들이 세상을 너무 쉽게 본 거죠.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닌데.”
“수현씨 부모님은 최선을 다하신 거야. 세상이 어려워도 수현씨 잘 키우려고 꿋꿋하셨고.”
부모의 젊은 날을 폄하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부모가 고생해서 저를 키워놨더니 한다는 말이 저러니 하고 흉보셨죠? 마저 들어보세요. 내가 돌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 집으로 갔대요. 어린 손주를 보면 맘이 풀리실 것 같아서. 하루 벌이 생활이 힘들어 도움도 받으려고. 근데 할아버지가 일언지하 내쫓으셨대요. 당신에겐 너 같은 아들이 없다고. 다시는 내 집에 발붙이지 말라며 야멸차게 내몰았대요. 지독한 영감탱이지요. 그나마 할머니가 이것, 저것 챙겨주시고 할아버지 몰래 돈도 주시고 그랬다고 해요.”
“할아버지는 끝내 반대하셨나?”
할아버지만 마음을 돌이키면 수현 씨 인생이 좀 편해지겠다 싶어 물었다.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새 부인을 얻으시면서 당신께서 살아생전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아빠를 불렀대요. 내가 너한테 줄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라며 아빠 이름으로 아파트 한 채를 주셨대요. 제가 중학생 때 이야기예요.”
“그 뒤론 형편이 좀 나아졌겠네?”
이제 좀 밝은 이야기가 나오려나 하며 물었다.
“꼬인 건 이때부터예요.”
“왜?”
“엄마가 바람을 피웠거든요. 사귀는 남자가 있었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빠를 만났고 세상물정 모른 채 애 키우느라 갖은 고생 다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다 엄마를 진짜로 품어줄 남자를 만난 거지요. 아빠 이름으로 된 아파트가 욕심나서 이혼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결과적으론 그리됐어요. 아빠는 너무 혼란스러웠나 봐요. 아파트를 포기하고 엄마한테 넘겼어요. 저에 대한 양육권도 엄마한테 위탁했고. 부랑아처럼 떠돌았지요. 아빠는 왜 이리 되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대요. 성격이 그래요. 알고 싶은데 모르면 못 참는 성격. 지금도 이유를 모른 채 떠돌고 있어요.”
“수현 씨 엄마가 새로운 사람은 만나 다른 행복을 찾은 거가 이유지.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아니오. 아빠가 왜 엄마한테 부족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지요.”
“수현 씨는 그게 뭐라고 생각해?”
“누구 잘못도 아니지요. 굳이 잘못이라면 너무 어렸다는 거지요. 서로를 몰랐던 거고. 행복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하는 거가 당연한데 그걸 주저했던 거고.”
“어머니는 지금 행복하신가?”
“그건 모르겠고. 새 아빠가 절 어려워했어요. 제가 사춘기여서 예민했기도 하고. 저도 집 떠날 궁리만 했어요. 당장 떠나고 싶었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가 없으니까. 내 생존권이 달려 있으니까. 어려워도 버티는 거죠. 내가 힘을 키울 때까지.”
“그때가 언젠데?”
“할아버지 집 근처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어요. 합격할 수 있는 만만한 학과에 지원했고. 다행히 붙었어요. 그 사이에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옷 가방만 챙겨서 새 할머니가 계신 집에 찾아갔어요. 할머니, 손녀딸 왔어요. 하고 인사했죠. 새 할머니가 한동안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찬찬히 훑어보셨어요. 옷 가방에 시선이 머물 때 제가 먼저 말했죠. 이제부터 할머니 집에서 지내려고 왔어요. 할머니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지요. 할아버지와 살림을 차렸지만 자식들과도 왕래를 안 했는데. 할아버지도 돌아가신 마당에 왠 손녀딸? 했겠죠. 좀 상황이 웃기지요?”
“수현 씨 입장에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였겠네.”
“부라보. 역시 관장님은 날 너무 잘 알아. 이제 아시겠죠. 제가 영악한 거.”
말을 마친 수현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른 후 잔을 비웠다. 그리곤 기절하듯 쓰러져 여자의 아들에게 엎혀야 했고 여자의 집에서 아침을 맞았다.
여자는 연임에 성공했고 두 번째 취임식이 끝나고 수현을 불렀다.
“수현 씨, 내가 연임에 성공했으니, 나한테 선물하나 해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선물을 드릴까요? 원하시는 선물이 따로 있나요?”
“지금 동거남에 대해 이야기해 줄래? 사적인 이야기라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때는 팀장으로부터 수현에 대한 징계 요청이 있었다. 수현은 일부러 늦었고 넋놓고 있는 날이 많았으며 일 처리에 실수가 잦았다. 여자는 수현이 동거남과 갈등이 있다고 짐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저녁 술자리에서 말씀드릴까요?”
“좋은 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쁜 건 저녁 술자리에서. 대신 취하면 안 돼. 아들이 오늘 집에 없어. 취해 기절하면 내 남편이 엎어서 집에 갈 거야.”
동거남 이야기에 수현의 얼굴이 한껏 들떴다. 요즘 축 처져 있는 것이 동거남 때문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거남을 처음 만난 건 대학교 때였어요.”
“최근에 만났잖아? 이혼하고 얼마 지나 만난 거 아니었나?”
“아니요. 앞뒤가 바뀌었어요. 최근에 다시 만나서 그것 때문에 이혼하고 동거를 시작한 거지요.”
여자는 기함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황급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수현은 관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눈치를 살피는 기색없이 꿈을 꾸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전에 말씀드렸지요. 새 할머니집에 머물면서 온갖 귀염을 다 떨었어요. 할머니도 처음엔 경계를 하시더니 나중엔 친손녀처럼 잘해주셨어요. 외롭고 적적했는데 황혼에 이게 왠 축복이냐며 좋아하셨죠. 저도 완전 만족이었어요. 따뜻한 잠자리. 나에 대한 넉넉한 배려.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지요.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죠.”
“그랬겠네. 좋은 시절이었겠어.”
음울했던 수현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그때 맛본 인생의 단맛이 얼마나 달고 달았을까. 이전까지의 불안이 가시면서 여자의 맘이 편안해졌다.
“그해 겨울 친구 따라 이웃산타 활동을 나갔어요.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봉사, 헌신, 선한 영향력 뭐 이런 것과도 전혀 관련이 없고요. 너도 살아생전 좋은 일 한번은 해야지. 라는 친구의 말이 시작이었어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잘생긴 남자애가 있다는 말이었구요. 메리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이에요. 길동이가 착하고 모범이 된다길래 먼 길을 찾아왔어요. 호호호.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았지만 친구는 단호했어요. 차라리 연탄 운반이나 도시락 배달 같은 것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지원자가 차고 넘쳐서 필요 없다고. 지금 할 수 있는 봉사는 이웃산타뿐이라고 했어요. 저도 고집을 부렸지요. 난 낯가림이 심해서 애들하고 놀아주질 못해. 친구는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리고 비밀을 털어놓더라고요. 내가 동아리 활동으로 연극반 한 거 모르지? 내가 낯가림이 심해서 고쳐 보려고 연극반에 들어갔거든. 오랜 연습 끝에 드디어 무대에 올라갔지. 다리가 후덜거리고 앞이 깜깜하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래도 올라갔지. 그리고 기절해서 끌려 내려왔지. 전 그뒤 두말없이 이웃산타 교육을 받았어요. 친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할 수 없이 미안했거든요.”
“그래서 이웃 산타는 잘했고? 동거남은 언제 만나는 건데?”
“맞다. 동거남 얘길 하려다 너무 길어졌네. 동거남을 만난 건 크리스마스 이브날 다가구주택의 지하방에서였어요. 이웃산타는 운전자 한명, 방문해서 말을 이끌어가는 인도자 두 명, 선물꾸러미를 들고 있는 한 명, 그렇게 4인이 한 조였어요. 저는 지원조라서 본부에 있었는데 전화가 온 거예요. 한 명이 안 왔다고 지원 나오라는 거예요. 다른 지원조는 동네 지리를 잘 몰라서 제가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다가구주택 지하방, 태양이네 집을 더듬어 찾아갔어요. 가보니 조원들의 의견이 갈려서 논의 중이었어요. 집에 사람이 없는 듯하니 다른 집으로 이동하자는 의견과 조금 더 확인하고 기다려보자는 의견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녹슬고 찌그러진 현관문 틈새로 불빛이 보인다며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던 남자아이가 현관문 안으로 속삭이듯 이야길 했어요. 태양아, 거기 있는 것 다 알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문 좀 열어줄래? 모두 숨죽이고 지켜봤지요. 얼마 뒤 문이 열렸어요. 시커먼 어둠 속에 널브러진 컵라면 봉지가 보였어요. 화장실 냄새와 할머니의 마른기침 소리도 이어졌고요.”
“그때 문을 두드리던 남자아이가 지금의 동거남?”
“맞아요. 그 아이는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가서 청소하기 시작했어요. 저도 뒤질세라 화장실 변기 청소부터 빨래도 챙겨 세탁기에 넣었고요. 원래 일정은 대상 아동한테 준비한 선물주고 덕담하고 나오는데 태양이네는 그럴 경황이 아니었어요. 다른 지원조를 불러야 할 판이었는데 태양이가 놀랄까봐 그냥 조원 네 명이 다 했지요. 후속지원은 인근 종교단체와 주민센터에서 맡기로 했어요. 산타활동이 끝나고 밤을 새워 뒷풀이하면서 우리 조원 네 명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날은 밝더라고요. 붉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커먼 어둠은 흩어지기 시작했어요.”
“장하네. 잘했어. 수현 씨도 어린 나이였는데.”
“아이고, 동거남 이야기는 안 하고. 이제 진짜 할게요. 어둠이 흩어지자 거뭇한 나뭇가지들이 보였어요. 용기를 내어 남자아이한테 갔어요. 붉은 일출이 얼마나 장엄하고 신성했는지 가슴이 떨리더라고요. 단호하게 이야기했어요. 난 네가 너무 좋아. 나랑 같이 살자. 남자아이가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지 웃기만 하더라고요. 제 눈빛을 보고서야 진심인 걸 알았지요. 왜 내가 좋은데? 하고 물었어요. 제가 대답했지요. 난 너같이 잘생긴 아이는 처음 봐. 네가 좋아. 그냥 좋아. 좋은데 다른 이유가 필요해? 그리고 석 달 뒤에 할머니 집에서 나와 그 아이랑 동거했어요.”
“그때 그 동거남과 헤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만난 거네.”
“헤어진 이야기는 저녁 술자리에서 하지요. 술기운이 필요할 것 같네요.”
헤어짐은 기억 저편에 안개가 끼어 그 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해도 마음을 여전히 아프게 한다. 수현도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선 술기운이 필요하리라. 여자는 가슴이 텅 빈 듯한 허전한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의 남편과 재혼하면서 다 메꾸어진 줄 알았다. 남편은 매 순간 충실했다. 그런데도 어느샌가 틈새가 생겼다. 그 틈새로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은 차가웠고 공간은 넓어졌다.
“저는 이런 남자가 세상이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어요. 이 남자와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었지요. 아하, 나의 신이 선량하셔서 나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는구나.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고마웠어요. 학교요? 학교 다닐 생각은 없었어요. 학교는 엄마의 새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입학한 거예요. 할머니 집으로 가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거든요.”
수현은 거칠게 술잔을 비웠고 여자는 맥주잔에 물을 가득 따라 수현에게 주었다.
“이 물잔 다 비워. 그래야 덜 취할 거야.”
“돈을 모으기 위해 둘이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아이를 가지기 전에 충분히 돈을 모아야 했어요. 내 부모같이 가난해서 내 아이가 나같이 슬프고 힘들어지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돈은 모았어?”
“충분하진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할머니께 부탁해서 할머니 돈으로 분식집을 얻었어요. 떡볶이, 김밥, 라면, 튀김 같은 간식거리를 만들어 팔았어요. 남편은 아니 동거남은 용접을 배워 용접일을 다녔고요. 남편이 아니고 동거남이 맞아요. 결혼식도 안 했고 결혼신고도 안 했으니까. 그런데 돈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수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긴장을 달래며 수현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벗꽃이 제 무게가 버거워 흐드러지게 날리던 4월 어느 날이었어요. 분식집 장사를 마치고 셔터를 내리는데 동거남이 왔어요. 지친 기색이 역력했어요. 얼굴이 흙빛이었어요. 어두웠지만 전 알 수 있었어요. 이제까지 그런 낯빛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분명히 기억해요. 용접을 배우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힘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영악하긴 한데 좀 단순하고 느려요. 그 아이가 말했어요. 우리 그만 헤어지자. 처음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여자가 말릴 새도 없이 수현이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들이켰다.
“어이도 없고 너무 놀라서 말을 못 했어요. 그 아이가 힘들게 말을 이어갔어요. 네가 지겨워서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서가 아니야. 넌 나의 유일한 신앙이야. 내가 너에게 눈부신 햇살이었다면 넌 나에게 거룩한 존재였어. 유일무이한 실체. 지금 이 순간도 그래. 하지만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야.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어.”
“말장난도 아니고. 그런 무책임한 얘기가 어디 있어?”
여자는 어이가 없었다. 정신병자도 아니고. 유일무이한 존재와 같이 살 수가 없다니 그럼 누구랑 살 건데? 말이 돼?
“그 아이가 떠나고 공황 상태가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목숨은 참 질겨요. 죽을 것 같았지만 살아지더라고요. 이유가 알고 싶었어요. 왜 그 아이가 견딜 수 없었는지. 무엇이 그를 머무르지 못하게 했는지. 그 아이의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났어요. 엄마는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못 할 시기에 사라졌대요. 열세 살 때부턴 아빠도 두세 달에 한 번 집에 왔고요. 시리고 추운 겨울, 두꺼운 외투를 입고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대요. 아니 추위보다 더 무서운 건 적막함이었겠지요.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외딴방에 덩그러니 혼자 놓여 있던 아이. 그 아인 거칠고 메말랐겠지요. 그 텅 비고 황량한 마음을 누구도 채워주질 못했으니. 그는 앓고 소리치며 괴로워서 떠난 걸 거예요. 텅빈 적막감을 메울 수 없어서. 그 쓸쓸함을 채우고 싶어서.”
여자의 입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아이의 아빠는 뭘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아빠도 사라졌대요. 이후 그 아이는 먼 친척 집에서 지냈다는데 정확한 행적은 친구도 모른다고 해요.”
수현이 그 동거남을 다시 보게 된 건 티브이 뉴스에서였다. 뉴스는 이웃산타행사를 보도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이 팍팍해져도 이웃에 대한 따뜻한 온기는 식지 않았다는 식상한 멘트가 이어졌다. 수현은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행사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신기했다. 곧이어 화면 가득 산타 복장을 한 수현의 연인이 활짝 웃고 있었다. 연인은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는데 뭐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수현은 방송사에 전화했다. 행사 주체를 물었고 그곳에 전화했고 연인의 안부를 물었다.
수현은 연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현이야. 잘 지내?’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바로 짧은 답신이 왔다.
‘잘 지내?’
수현은 숨이 막혔다. 그가 드디어 그 적막함을 다 메꾸었나?
‘잘 지내. 결혼했고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도 있고. 넌 어찌 지내?’
‘떠돌아다녔고 지금도 떠돌고 있어.’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고?’
‘아직도 그런 게 궁금해?’
‘그럼 뭐가 궁금해야 하는데?’
‘아직도 내가 보고 싶어? 그런 게 궁금해야지.’
‘넌 어떤데? 내가 그리워?’
‘보고 싶어. 넌?’
‘보고 싶어. 미치게 보고 싶어.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데?’
‘네 남편은? 아이는?’
수현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 나에겐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었지. 그를 만나고 싶고 가정도 지켜야 하고. 이럴 때는 어쩌나?
수현은 딱 삼 일간 고민했다. 삼 일 뒤 수현은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했다. 수현은 십여 년 전 헤어진 연인과 다시 동거를 시작했다. 연인은 친절하고 상냥했다. 성품이 온화해서 수현의 아들과도 잘 어울렸다. 집안일까지 전담했다. 수현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차렸고 아들이 학교 가는 일을 돌봤다. 직장도 안정적이었다. 수현은 다시 찾은 두 번 다시 없을 행복에 감사했다. 나의 신께서 나를 좋게 여기시어 나에게 이런 축복을 주셨구나. 하며 거듭 감사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어느 날 동거남이 도박한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친구들하고 푼돈내기였고 빈도도 어쩌다 한 번이었는데 이젠 손을 뗄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늦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수현은 흔들렸다. 먼 산을 보며 넋을 놓는 날들이 늘었고 눈동자는 수시로 흔들렸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다반사였다. 수현은 도박하는 동거남을 감당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다.
여자는 어떤 때는 수현의 일을 모른 척 외면하며 모질게 대했다. 수현씨, 강사님들 자격증 사본 다 제출받았어요? 강좌가 진행된 지 6주가 지났는데도 강사님 프로필 확인도 안된 게 말이 되나? 도대체 정신이 있긴 한가요? 일에 집중시키면 개인사가 희석되리라 믿었다. 삼라만상의 모든 일을 주어서 충격을 잊도록 하는 것이다. 수현의 명석하고 재치있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한숨만 깊었다.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흐르고 변해야 하는 것들이 흐르지 않았고 변하지 않아 견고히 고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