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노벨상

세상 억울한 천재 이야기 2 _ 로잘린드 프랭클린

by 동고마리

시작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아이디어


프랭클린은 DNA의 구체적인 구조를 밝혀내고 싶었다. 인간의 세포에 들어있는 DNA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아야 유전의 비밀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DNA의 형태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적용한 방법이 X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DNA 샘플에 X선을 비춰 투과된 X선의 진하고 흐린 정도를 통해 DNA 구조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X선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른 과학자들도 시도하는 방법이었다. 플랭클린에 이 방법에 더하여 정확한 형태를 얻기 위한 아이디어를 낸다. 바로 샘플의 수분 함량을 최대한 자연 상태에 맞추는 것이다.

51번 사진. 프랭클린이 촬영한 인간 침샘의 DNA 형태이다. 사진의 중앙에 리본처럼 생긴 나선형 구조가 보인다.

DNA 샘플은 인간의 침샘에서 추출해 낸 것이었다. 따라서 DNA 샘플을 인간의 몸속, 침샘일 때의 조건을 최대한 살려준다면 더욱 생생한 DNA 형태를 촬영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프랭클린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DNA 샘플에 수분을 조금씩 조절하면서 달라지는 DNA의 형태를 촬영했다. 그러다 드디어 DNA 샘플의 수분 함량이 92퍼센트에 이르렀을 때 프랭클린은 이른바 51번 사진을 얻었다.

프랭클린은 51번 사진을 토대로 논문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녀의 논문은 출판되지 않았다. 프랭클린의 51번 사진은 그녀의 동료였던 모리스 윌킨스에 의해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건네졌다. 물론 프랭클린의 허락을 받은 적은 없었다. 두 사람은 이 사진에서 DNA 구조가 이중나선이라는 영감을 얻었고 그들은 곧바로 이중나선 모델을 만들었다. 이렇게 DNA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은 RNA 연구와 유전 암호 연구로 1962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했다. 윌킨스도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공동 수상을 하는 영예를 안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1958년 37세의 나이에 암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원인은 모두가 짐작하다시피 X선에 너무 오래 노출된 탓이었다.



세상 억울할 것 같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1922년 런던 노팅힐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랭클린은 어릴 때부터 과학, 라틴어, 스포츠에서 탁월한 소질을 드러냈다. 그녀는 193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해 화학을 공부했고 1941년에 우등 졸업을 하면서 케임브리지에서 연구 장학생에 선정되었다. 박사 과정을 진행하기 전 그녀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영국석탄이용연구소로 잠깐 자리를 옮기는데 이때 연구한 다공성 석탄으로 훗날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로잘린드 프랭클린.

1950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칼리지에서 X선 회절 장치를 이용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모리스 윌킨스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잦은 불화를 겪게 된다. 예를 들면 프랭클린은 자신만이 DNA를 연구한다고 생각한 반면, 윌킨스는 자신의 일이 프랭클린이 찍은 사진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데 윌킨스가 개입한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격화되었다.

이들의 관계는 프랭클린이 킹스칼리지를 떠날 무렵 윌킨스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프랭클린의 51번 사진을 건네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도 프랭클린의 연구 성과를 무시하고 있었으나 51번 사진을 본 순간 그녀가 옳았으며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DNA 구조의 형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했다는 것. (겉으로는 여전히 프랭클린을 인정하지 않았다)

D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단서와 영감을 제공했음에도 노벨상은 물론이고 그 공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요즘 같으면 크게 소송이 제기될 사안인데도 그렇다.

프랭클린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여성 과학자들을 전문가로 인정하지 않고 급여 없이 부려 먹던 시대였다. 그렇다고 킹스칼리지가 프랭클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프랭클린의 연구 성과는 킹스칼리지 소유라는 합리화, 당시 여성 과학자의 연구 성과를 함부로 가져다 쓰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무지가 지배적이었던 듯하다. 프랭클린의 연구 성과는 ‘킹스칼리지의 데이터’로 뭉뚱그려졌고 나중에 왓슨과 크릭의 모델에는 킹스칼리지로부터 정보를 받았다는 식으로 합의되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자신의 업적은 인정받지 못하고 노벨상 수상도 하지 못했다. 왓슨과 크릭, 윌킨스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것은 1962년이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암으로 사망한 시점은 1958년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아서 프랭클린이 노벨상 수상을 못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X선에 몸을 상해가며 연구한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이(심지어 프랭클린을 비하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은 안타깝다.

모리스 윌킨스.

옛날에는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도 시대를 잘못 만나 누군가의 재능과 업적이 과소평가되거나 심지어 도둑맞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물론 과학자들에게는 인정욕구보다 더 큰 발견의 쾌감 같은 게 있으리라 조심스레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프랭클린이 자신의 51번 사진으로 남들이 이런저런 논물을 발표하고 유명해졌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그게 또 과학자들의 남다른 그루브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도 쓸쓸한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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