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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May 23. 2023

12주차. 흐드러진 입덧의 기억 Act.2

다시 새롭게 시작된 압도적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내 삭제된 시간 사이로 봄기운이 가득 들어찼었나 봅니다. 문득-, 한낮의 볕이 남달라 베란다 창을 열어보았습니다. 한동안 나만의 세계에 웅크려만 있다 보니 몰랐는데 어느새 제주도 집 마당은 아찔할 절도로 눈부신 분홍 꽃비가 장관이더군요. 호사스러운 봄 잔치를 벌써 지나온 시간은 다정한 바람과 마지막 왈츠를 마치고 거리를 캔디 꽃잎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나만의 겨울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12주. 불쑥 내 인생에 끼어든 임신과 그에 따른 달갑지 않은 불청객 ‘입덧’으로 인해 내 모든 에너지는 안으로 삭아야만 했습니다. 24시간 배 멀미와 맞먹는 증상을 홀로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 그간 나의 지상과제는 오로지 하나. 시간을 죽여 내는 것이었습니다.      


입덧[emesis gravidarum]이란 임신 중에 느끼는 구역 및 구토 증상으로, 주로 임신 초기에 발생하는 소화기 계통의 증세를 말한다. 전체 임신부의 70~85%에서 나타나며, 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생리적인 현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초기 임산부들이 경험하는 입덧의 증상은 다양합니다.

  “우욱!”

  먼저,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익숙한 클리셰의 주인공, 역한 음식을 접하게 되면 토악질을 하게 되는 ‘토덧’. 속이 비게 되면 울렁거려 하루 종일 먹을 것을 달고 살아야 하는 ‘먹덧’, 음식을 먹은 후 가슴이 답답한 체기를 느끼게 되는 ‘체덧’, 하다 하다 본인의 침 냄새에 조차 반응하게 되는 ‘침덧’, 이외에도 ‘냄새덧’, ‘양치덧’, ‘쓴덧’, ‘물덧’ 등등. 오늘날 우리네 임산부 동지들은 본인의 증상을 세심하게 살피고 다양한 갈레로 분류를 해냈습니다.      

  나의 경우는 ‘먹덧’과 ‘체덧’이 절묘한 조화를 이뤘으며, 이는 식전과 식후에 전방위 적으로 호르몬공격을 퍼부어댔어요. 시작은 부대찌개였습니다. 밀키트로 된 부대찌개 이후 햄과 소시지는 식탁에서 한동안 추방당했으며, 그날로 내 일상의 식도락은 처형당했습니다.


  “첫째 때 먹어줬던 ‘복숭아’와 ‘포카리스웨트’로 버티지 뭐!”


  오판입니다. 둘째(Act2)는 첫째와 달리 입덧은 새로운 전술과 신무기를 들고 나의 위장을 공격했어요. 둘째라고 별 수는 없더군요. 다시 새롭게 시작된 압도적인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매일 그날의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는 것뿐이었습니다.


 

 ‘누룽지’, ‘된장찌개’, ‘수프’, ‘비빔면’, ‘사과주스’, ‘입덧캔디’.

  내 몸은 리트머스 종이가 되어 매일 오늘자로 속이 괜찮은 음식들을 판별해 냈습니다. 운이 좋으면 숨통이 조금이나마 틔워졌어요. 물론, 어제 괜찮았다고 해서 오늘도 괜찮을 리는 없었으며, 사전에 정오를 판별할 순 없었습니다. 한 번은 동네 숨은 맛집에서 하는 불맛 매콤한 낙삼볶음이 잘 맞았던 경험이 떠올라 시간을 내어 다시 그 가게를 찾았습니다. 분명 며칠 전엔 밥그릇을 싹싹 비웠는데 그날은 영 먹히지 않았습니다. '이거, 심상치 않다.' 결국 저녁부터 위장에서 나는 불을 세탁세제로 진화하는 듯한 따끔함과 느글거림 동시에 겪으며 새벽까지 잠을 설쳤드랬죠.


  “어머님, 입덧약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고통을 호소하는 내게, 산부인과 선생님이 ‘디클렉틴’을 처방해 줬습니다. 미심쩍었지만 안전성이 입증되었다고 몇 차례 안심시켜 주신 덕분에 신문물 입덧약을 시도해 보았어요. 극악의 입덧증상이 발현되는 아침과 저녁 시간대에서 상당 부분 효과를 보았습니다. 현대의학 만세.


  하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전장의 참혹성 속에 병사들이 모르핀과 메스암페타민에 의존하는 모습을 본 적있으실까요? 비약하자면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내일의 두통과 메스꺼움(오심(惡心))을 잠시 잊기 위해 입덧약을 갈구했습니다. 복용량도 1알이었던 것이 3알까지 늘었습니다.

  입덧약은 내 말초신경까지 숨은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입덧증상을 막아내는 ‘제방’을 쌓는데 쓰는 건지 뭔지 모든 삶의 의욕을 끊어냈습니다. 먹기도 씻기도 싫은 기분. 그저 침대와 한 몸인 꼴로 드라마를 BGM 삼듯 의욕 없이 정주행 하며 하루하루를 참는 수밖에요. 그런 상태로 2023년 제주 삼성혈에, 녹산로에, 신풍리에 ‘혼저옵신’ 벚꽃을 마중도 못 나가고 흘려보냈습니다.


  생각하면 30년 이상 살면서, 혼자 내면 속에 웅크려져 있다 보니 놓친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난 또다시 흘려버린 아름다움을 아쉬워하며 꽃그늘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디클렉틴이 한 알 남았고, 배가 소복하게 불러온 4월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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