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석 더 프리맨 May 14. 2022

업신여김 말라, 나름 뼈대있는 가문

[푸드로지] 우리고 볶고 조리고 팔방미어, 멸치 랩소디

  

갓 잡은 싱싱한 대멸치를 채소와 함께 버무려 낸 멸치회 무침. 요즘 부산 기장이나 남해 미조항에서 맛볼 수 있다.



■ 이우석의 푸드로지 - 멸치
작은 청어라 불리며 밑국물로 가장많이 쓰여
통째로 먹어 칼슘·비타민D 등 한번에 섭취
미나리·고추장과 함께 버무리면 상큼한 맛
전통 방식으로 잡은 ‘죽방멸치’ 가장 비싸
유럽의 ‘안초비’는 제주의 ‘멜젓’과 비슷


멸치의 계절이다. 봄 바다 밑에는 은빛 물결이다. 물 밖에도 그렇다. 어부의 억센 팔뚝으로 끌어올린 그물을 털면, 봄이 펄펄 뛴다. 고된 노동의 땀방울과 함께 사방으로 튀어 올라 부서지고 마는 은빛 봄이 지금 남쪽 바닷가에 있다.

햇살 눈부신 봄 4∼5월에 제철을 맞은 멸치. 작고 보잘것없다고, 이름부터 멸어(蔑魚)라 불릴 정도로 업신여김을 받았다. 지금도 통용되는 이름이지만 온갖 좋지 않은 단어는 죄다 갖다 붙였다. 자산어보(玆山魚譜)에 나온 멸어의 멸(蔑)은 ‘업신여기다’는 뜻이다. ‘멸시’할 때 쓰는 글자다. 또한 추어(魚)라고도 했는데, 추()도 작고 보잘것없다는 의미다. 그보다 앞선 1803년 김려가 지은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서는 멸치를 멸아( 兒), 말자어(末子魚)로도 기록했다. 어떨 때는 올리자마자 죽는다며 떼죽음 당한다는 의미로 멸(滅) 자까지 붙였다. 무엇이 됐든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동남방언 ‘메루치’가 낫다.

이름은 그렇게 붙여 놓고 찾기는 오달지게도 찾는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잡아들이는 어종이 멸치와 명태다. 한국 식탁에서 없으면 안 될 고마운 바다 식재료다. 멸치는 작은 청어라 해도 될 만큼 그와 닮았다. 실제로도 청어목 멸칫과에 속한다. 청어목에는 전어부터 준치, 정어리, 밴댕이(디포리) 등이 속한다. 신기하게도 모두 국물 맛을 내는 데 최고로 치는 밑국물 재료다.

우리가 쉽게 보는 멸치는 태평양 극동 부근에 많이 서식하며 유럽 지중해에도 유럽멸치 종이 따로 있다. 남미 페루에서도 많이 난다. 먹지 않고 비료로 써서 그렇지, 노력해서 잡는 어종이다. 개체는 작지만 워낙에 떼로 몰려다니는 데다 연안에 서식해 어선의 노획과 수익에 좋다.


  



멸치는 세멸과 자멸, 소멸처럼 작은 것이 많지만 때때로 큰 놈도 있다. 특히 대멸이라 불리는 큰 멸치는 얼추 작은 꽁치만 하다. 일제강점기에 도입한 어획법의 영향인지 현지 어선에서는 멸치 종류를 아직 일본어로 부른다. 작은 순서대로 ‘지리, 가이리, 고바, 주바, 오바’라고 한다.


유럽멸치는 안초비(European anchovy)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데, 청어목 멸칫과 멸치속으로 우리 멸치와 ‘한집안’이다. 크기로 보자면 대멸에 속하며 주로 튀기거나 젓갈을 담가 먹는다. 그리스와 터키의 멸치 튀김 ‘함시’가 유명하다. 이름 그대로 안초비라 하면 그 젓갈을 말하기도 한다. 제주의 ‘멜젓’ 같은 느낌인데 생선살이 그대로 살아 있고 기름에 절였다는 점이 다르다.


전 세계 인류 중 30% 정도가 멸치를 상식한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인들에게 멸치는 매우 중요한 식재료 중 하나다. 한식에서는 멸치가 정말 유용하게 쓰인다. 기름에 볶아서 조린 멸치볶음처럼 눈에 드러나는 요리도 있지만, 국물을 내고 꺼내 버린 마른 멸치나 김치, 장아찌 등에 든 멸치액젓처럼 보이지 않는 데도 쓰인다.


멸치에는 영양소도 많다. 통째로 먹는 까닭에 칼슘과 비타민D를 한 번에 섭취할 수 있어 다른 음식에 비해 칼슘 흡수율이 높다. 덕분에 과거 학생 도시락 반찬이나 요즘 급식에 자주 등장하는 메뉴로 멸치볶음은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의외로 ‘메루치 똥’이라 부르는 내장에 우수한 영양분이 많다. 멸치의 배 안에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가득한데 여기에 DHAEPACoQ10DMAE가 많이 함유돼 있다. 무슨 국제기구 이름 같지만 모두 몸에 유익한 성분이다.


  

부산 기장의 대변항에서 그물로 잡은 멸치를 털어 내는 모습.


자산어보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 따르면, 과거에는 멸치를 잡아 젓을 담그거나 그대로 말려 포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전래된 니보시(煮干し) 제법으로 마른 멸치를 제조한다. 니보시는 배에 솥을 걸고 잡은 멸치를 바로 삶은 다음 육지에 와서 말리는 제법이나 그렇게 말린 멸치를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멸치를 말리는 건 어선에 물을 끓이는 장비를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대형화돼야만 가능한 일이니 근대에 생겨난 것이 맞다.


요즘은 커다란 굴뚝을 세운 증기시설을 갖춘 가공선 2척과 1조를 이루는 기선권현망(어탐선 2척·어망선 2척·가공선 2척) 조업으로 잡자마자 배 위에서 바로 자숙멸치로 가공한다.


선인망(船引罔)이나 유자망(流刺網)으로 잡은 생멸치는 따로 육지로 가져와 멸치털이를 한다. 항구에 하선하자마자 그물에 박힌 멸치를 털어 내는 작업을 멸치후리기라고도 하는데 요즘 부산 기장 대변항이나 남해 미조항 등지에 가면 이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털어 낸 멸치는 바로 회를 무쳐 먹거나 구워 먹고 튀겨 먹는다. 봄철 채소인 미나리와 함께 막걸리초, 고추장 등을 넣고 버무려 먹으면 부드럽고 녹진한 살맛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기름진 횟감이지만 채소와 함께 먹으면 느끼하지 않고 상큼한 봄맛을 낸다. 크기가 제법 되는 대멸의 경우 조려서 쌈밥으로 먹어도 칼칼하니 맛이 좋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멸치 중 가장 비싼 건 전통적 방식으로 잡은 죽방멸치다. 멸치 떼가 지나는 좁은 해협에 대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 V자 모양 죽방렴을 만들고 여기 걸린 멸치를 뜰채로 떠내 잡은 걸 죽방멸치라 한다. 남해 지족해협 등 죽방렴이 가능한 곳이 전국적으로 얼마 없어 소량만 잡히는 데다 비늘이 그물에 상하지 않아 온전한 상태로 어획할 수 있어 고급 선물로 팔린다.


군집해 물속을 돌아다니던 멸치는 뭍에 올라 그 생명이 다했지만, 우리 식탁 위에서 더욱 살아 펄펄 뛴다. 몸은 비록 작지만 그 안에는 깊고 그윽한 바다의 맛이 들었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가산식당 = 멸치로 따지자면 남해군을 빼놓을 수 없다. 남해 곳곳에서 멸치쌈밥을 팔지만 ‘본향’은 미조항이다. 항구 앞에서 백반 스타일 한상차림을 내는 식당으로, 양념 없이 날파만 곁들인 멸치회와 칼칼한 멸치찌개를 맛볼 수 있다. 혀로도 씹을 수 있는 녹진한 멸치 살에서 비린내는커녕 향긋한 바다내음마저 느낄 수 있다. 이것저것 차려 내는 세트도 있다. 남해군 미조면 미조로 244. 3만 원. 세트 5만 원(2인).


◇용암할매횟집 = 봄 멸치 주산지인 기장 대변항에 위치했다. 매콤한 무침으로 즐기는 멸치회를 깻잎 쌈으로 즐길 수 있다. 새콤달콤한 양념과 채소가 부드러운 멸치 살과 잘 어울린다. 방아잎을 넣고 맵싸하게 끓여 낸 멸치찌개는 국물이 많아 밥을 말아 먹기에 좋다. 싱싱한 대멸을 바로 석쇠에 구워 낸 멸치구이도 별미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기장해안로 631. 2만 원부터. 멸치구이 1만 원.

◇부송국수 = 익산을 대표하는 국숫집이다. 진하게 우려 낸 멸치 국물에 콩나물을 데쳐 넣고 소면을 말아 양푼에 낸다. 양념간장을 올려 먹으면 이걸로 끝이다. 시원한 육수 맛이 일품이며 겉절이 김치와도 궁합이 아주 좋다. 국수를 먹기 전에 하나씩 기본으로 챙겨 주는 ‘약계란’을 까먹으면 단백질을 보강해 영양균형도 맞는다. 국수는 대, 중, 소가 있지만 값은 똑같다. 익산시 부송로 196000원.


◇춘자멸치국수=상호부터가 ‘멸치국수’다. 제주도에서 국수는 보통 고기(돼지)국수 아니면 멜(멸치)국수다. 그리 특별할 건 없지만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다. 멸치 육수가 다했다. 쫄깃하게 잘 삶아 낸 소면 가락에 스민 육수를 마시자면, 입에 짝짝 붙었다 금세 꿀꺽 넘어간다. 재료에는 청량감을 내는 게 전혀 없지만 속이 다 후련해진다. ‘춘자싸롱’이라고도 불린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동서로 2554000원. 곱빼기 5000원.

◇핏제리아 오=나폴리 스타일 피자와 다양한 파스타를 정통으로 선보이는 집. 서울의 대표 피자집이다. 셰프는 이탈리아 현지 대회에 가서 챔피언을 차지했다. 무려 1m짜리 메트로 피자가 압권이다. 나폴리 지역의 ‘특허’ 피자다. 루콜라, 포모도로, 프로슈토, 올리브 등 토핑 재료는 다양하지만 밑에서 맛을 조율하는 것은 감칠맛을 내는 안초비다. 미리 주문해야 한다. 서울 종로구 동숭길 86. 8만9000원.

◇광천식당=칼국수로 유명한 대전에서 매콤한 두루치기로 입소문 난 맛집. 이 집의 히든카드는 두루치기의 매운맛을 씻어 내는 멸치 국물이다. 칼국수를 주문하면 멸치 향 진한 국물에 면을 말아 준다. 씹을수록 맛을 내는 면발도 유명하지만 육수가 참 맛깔난다. 알고명과 쑥갓, 김가루, 참깨 등 고명도 시원한 육수에 맛을 더한다. 대전 중구 대종로505번길 296000원.

◇충무집=도리 없다. 지난주 멍게비빔밥으로 이미 소개했지만, 요즘 서울에서 멸치회를 파는 곳 중 가장 유명한 이 집을 빼놓을 수는 없다. 통영 정통식으로 미나리, 양파 등 채소를 넣고 초무침으로 낸다. 이 집 음식이 모두 그렇듯 색에 비해 맵지 않아 멸치 살의 고소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멸치회를 파는 기간에는 실치전도 판다. 서울 중구 을지로3길 30-14. 3만5000원.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의 꽃, 멍게 미더덕 피었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