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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석 더 프리맨 Nov 26. 2022

‘보물같은 한 쌈’ 보쌈에 무쳐

[푸드로지] 김장철 최대의 이벤트, 김치에 수육 한점

보쌈김치와 돼지고기 수육. ‘보쌈’이란 본래 개성지방에서 시작한 김치를 이르는 말이었는데, 이제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함께 내는 메뉴를 뜻하는 말이 됐다.

■ 이우석의 푸드로지 - 김장철 ‘보쌈’
돼지고기 수육으로 통용된 보쌈
원래는 보쌈김치만 특정해 불러
개성 향토음식 ‘쌈김치’에서 유래
갓담근 김치, 섬유소 · 유산균 많아
담백하게 삶은 수육과 찰떡궁합
굴 · 홍어 · 오징어 등 곁들임 추가
다채로운 맛으로 즐길 수 있어


김장철이다.


대한민국 식문화 중 가장 특별한 것이 김장이다. 김장 담그는 시기는 기후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보통은 11월 중순이 절정이다. 온난화의 영향 탓인지 늦게는 남부지방에서 12월 초까지도 김장을 담근다. 노지에서 재배한 결구 배추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다. 기온으로 따지자면 하루 평균기온 4도 정도에 최저기온이 0도 이하 정도인데, 요즘처럼 기온이 들쑥날쑥한다면 당최 시기를 짐작할 수 없다.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김장, 대한민국 김장철의 최고 이벤트(?)는 바로 갓 담근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곁들여 먹는 것이다. 집단 노동력을 요구하는 행사다 보니 으레 수육을 삶고 막걸리를 받아 일손을 대접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다. 옛날엔 김장독 묻을 구덩이도 파야 하니 남녀 품이 많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화가 외식 메뉴로 굳어진 것이 바로 ‘보쌈’이다. 원래는 구성요소 중 보쌈김치만을 특정해 가리키는 이름이고, ‘보쌈김치와 돼지고기 수육’이라 해야 적확히 메뉴를 설명하는 말이 되겠다. 본말이 전도된 경우다. 보쌈김치가 어느새 돼지고기 수육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보쌈은 보기 드문 경기도 특유의 향토 음식 문화다.


경기도 북부 개성지방에서 시작했다. 갖은 채소와 해산물, 과일 등을 양념해 부드러운 배춧잎에 싼 음식으로 품이나 재료가 많이 가는 것이 굉장히 고급 김치에 해당한다. 개성에선 그냥 ‘쌈김치’라 부른다. 보쌈이란 말이 공교롭게도 납치혼을 의미하는 말과 같은 탓이다. 즐겨 먹는 음식에 같은 이름을 쓰기엔 그 옛날에도 부적절했나 보다.


본시 개성은 전통 음식문화로 이름난 곳이다. 예로부터 물산이 넘쳐나고 권력이 있고, 그에 따른 풍류 문화가 최고로 발달한 곳인 까닭이다. 또 고려 왕조가 물려준 궁중 음식 문화가 기본 바탕이 되었다. 개성 음식 중 지금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개성 쌈김치, 개성 불고기, 조랭이떡국, 개성편수, 개성약과 등이 있다. 모두 손과 재료가 많이 가는 음식이다.

아무튼 개성 쌈김치는 향토 음식으로 전국적 유명세를 치렀다.


1940년대 들어야 겨우 문헌에 등장하지만 그 이전부터 기방이나 반가에서 즐겼던 음식이었다고 한다. 전복과 굴, 낙지 등 해산물에다 잣과 밤, 배, 사과, 대추 등 귀한 과일까지 들어가 한때 궁중음식의 범주에 들기도 했다. 궁궐이나 양반가에서 해먹을 수 있었던 보쌈김치는 원래 개성이 고려와 조선의 최대 상업도시로 늘 돈이 돌던 부유한 지방이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인삼 등을 팔아 떼돈을 모은 송상(松商)들의 밥상에 오르는 값진 메뉴로 이름을 날렸다.


개성 지방이 둥글게 맺는 결구(結球) 배추가 많이 나던 곳이라는 점도 보쌈김치의 탄생에 한몫했다. 개성배추는 20세기 들어 이뤄진 우장춘 박사의 품종 개량 이전에도 연하고 튼실한 배추로 유명했다. 예성강을 따라 물산이 집산되는 까닭에 특산물인 개성배추에다, 서해안 곳곳의 싱싱한 해물과 내륙의 여러 견과, 과일, 채소를 구해 김치에 접목시키기 쉬웠다. 보쌈김치에는 은근히 채소도 많이 들어간다. 배추와 무 이외에도 미나리, 쪽파, 마늘, 생강, 실고추 등을 듬뿍 썼다. 아낌없이 재료를 쓴 보쌈김치는 주로 며칠만 익혀 맛을 낸다. 푹 삭혀 먹는 남도의 묵은지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돼지 앞다릿살, 돼지목살, 삼겹살 등을 수육에 곁들여 먹으면 서로 맛을 보하니 어우러짐이 최고다. 특히 갓 담아 며칠만 익힌 김치에는 섬유소와 유산균,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어 장에 좋고 소화가 잘되며, 수육 역시 기름을 적당히 뺀 담백한 맛을 내니 육류 섭취치고는 꽤 건강식이라 할 수 있다. 보통은 돼지고기를 삶는다. 가끔 아롱사태를 삶아 소고기 보쌈이니 하고 내는 집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돼지고기를 쓴다. 특히 양념 무 생채와 데친 오징어를 버무려 상추쌈에 싸 먹는 오징어 보쌈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쌈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보쌈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쌈의 의미를 단순히 ‘쌈을 싸 먹는 것’에 맞춘 현대식 해석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한편, 굴보쌈이니 홍어보쌈이니 하는 것은 보쌈에다 굴과 홍어회 등을 추가한 경우다. 곁들임 메뉴를 추가해 보다 다채롭게 보쌈을 즐기기 위해 탄생한 식단이다. 굴이야 제철이 겹치는 김장 때 수육과 함께 즐겨온 학습효과로 인해 제법 어울리는 곁들임 찬으로 인기를 끌고 있고, 홍어 역시 묵은지와 수육을 곁들이는 홍어삼합의 변종으로 보쌈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조리 원리가 비슷하다 보니 시중에는 족발과 보쌈을 같이 하는 집들이 많다. 족발이나 보쌈이나 삶은 돼지고기를 썰어내는 숙육(熟肉), 즉 수육에 기초한 메뉴인 까닭이다. 수육이란 물에 삶은 고기가 아니라 한자어 숙육에서 받침이 떨어지며 생겨난 말이다. 보쌈김치도 대충 무채만 많이 넣고 달달하게 겉절이로 담그는 집이 있는가 하면 정말 기본을 지켜 다양한 속 재료를 넣고 일일이 담가 상에 올리는 집이 있어 그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모든 걸 제대로 하려면 식재료 값만도 상당하고 품과 시간도 많이 든다.



외국에는 당연히 이 같은 요리가 없다. 고도화된 우리 김치 문화가 바탕이 된 김치를 요리로 즐기기의 결정판이 보쌈인 이유다. 사실 김치찌개와 김치찜을 제외하고 김치가 밥상의 주연인 경우가 없다. 보쌈은 한식에서 부식인 김치가 주찬(主餐)으로 대접받는 드문 경우다. 외국인 사이에서 보쌈은 불고기나 삼계탕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선 꽤 인기가 높은 메뉴다. 언젠가부터 김치를 즐겨왔고 폭 삭힌 묵은지보다는 적당히 달달하면서 칼칼한 맛을 내는 보쌈이 그들의 입에 잘 들어맞는다는 얘기다.

일본 내에서 유통되는 한식 소개 콘텐츠에는 보쌈에 대한 얘기가 가끔 나온다. 보쌈에 내는 수육 역시 비슷한 조리 원리인 차슈 등을 통해 친숙한 맛을 내니 열광할 만하다. 일본 내 한식 레스토랑에선 글자 그대로 폿사무(ポッサム)라 부른다. 뭐든지 자국 기원설을 주장하는 중국에선 후이궈로우(回鍋肉), 차사오(叉燒) 등 다양한 수육 종류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김치가 빠졌다는 점이 크게 달라 보쌈만큼은 아직 종주국임을 주장하는 얘기가 없다.



상토주무(桑土綢繆)라, 기나긴 동토의 겨울을 준비하는 농경민족의 지혜가 낳은 김장 문화. 결실과 수확의 기쁨은 비록 잠시일망정 맛난 음식 보쌈과 함께 즐기는 가을날의 마지막 축제가 더욱 기대되는 요즘이다. 절임배추나 날라주고 서성이다 수육 한 점에 날김치 쭉 찢어 먹고 나면 비로소 추운 겨울을 맞을 수 있을 듯하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서울 녹번동 충무칼국수의 수육과 보쌈김치.

◇충무칼국수보쌈 = 잘 삶아낸 삼겹살 보쌈과 뜨끈한 칼국수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은평구청 앞에서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고 각지에서 몰려든다. 굴, 소라, 낙지 보쌈 중 골라서 즐기면 된다. 고기는 껍데기를 붙인 삼겹살을 두툼하게 썰어주고, 굴이 가득 들어있는 김치에는 배와 밤을 넣어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난다. 밑반찬으로 주는 김에 굴김치와 삼겹살을 올려 싸먹으면 색다르다. 대(大)를 주문하면 양이 엄청나다. 칼국수도 포기할 순 없다. 서울 은평구 은평로 193 2층. 소 3만2000원부터.


서울 무교동 장군보쌈의 수육과 보쌈김치.


◇장군보쌈족발 = 연골이 박힌 삼겹살만 고집한다. 적당히 익힌 김치는 소가 많이 들어 심심하지 않으며 굴보쌈으로 주문하면 생굴을 따로 내준다. 진정성이 담겨있는 김치와 수육만으로도 만족스럽지만 홍어회를 추가해 홍어삼합 보쌈으로도 즐길 수 있다. 곁들여내는 배추된장국이 별미다. 족발과 함께 묶은 보족세트도 있어 인근 직장인들의 회식메뉴로 인기다. 수육보다 좀 더 탱글한 족발을 좋아한다면 보쌈김치만 추가해도 좋다. 서울 중구 무교로 16. 소 2만9000원부터.


경기 안양 동해오징어보쌈의 오징어보쌈.

◇동해오징어보쌈 = 데친 오징어 무침을 보쌈의 경지로 승화시킨 집이다. 요즘 특히 더 단맛이 두드러진 무생채를 칼칼하게 무쳐서 오징어 데침과 함께 곁들여 쌈을 싸먹는 재미가 있다. 충분히 화끈한 매운맛이지만 그리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매운 정도는 콩나물 데침으로 조절할 수 있다. 기본 제공하는 동치미도 시원하지만 역시나 매콤한 섞어찌개를 필수로 주문해야 제맛이다. 매운맛에 풍미를 더한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장내로 139번길 56-12 스타프라자. 1만4000원.


서울 청담동 콜룸바 청담의 굴보쌈.

◇콜룸바 청담 = 싱글몰트 위스키와 와인, 그날그날 달라지는 가정식 메뉴를 차리는 스피크이지(speak easy) 바다. 주인에게 맡기는 일명 오마카세(お任せ) 방식으로 한식과 양식을 아우르는 소찬을 코스로 제공한다. 샤퀴테리와 스테이크에서부터 백합술찜, 충무김밥까지 다채로우면서도 페어링이 좋은 음식을 직접 차려내는 집. 계절 메뉴를 중요시해서인지 요즘은 보쌈도 낸다. 간판이 없지만 정확하게 이 주소에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80길 34지하 1층. 오마카세 1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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