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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천년 역사를 거스른 나일강의 연어였다

정겨운 사람들과 유구한 역사, 이집트 여행

by 이우석 더 프리맨
곧 병이 물러가고 사람들이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그럼 입국제한도 풀리고 격리 당하지 않아도 된다. 근데 나는 언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마지막 봄비로 씻은 우산을 정리하고 난 후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카카오 팝콘프렌즈’ 대신 잠시 여행 생각에 잠겼다.

리우데자네이루 이파네마 해변, 파리 생제르맹 카페, 샌디에고 라호야 비치의 팬케이크 가게.

아고다의 추천여행 일람처럼 그림들이 떠오른다. 근데 갑자기 엉뚱하게도 이집트가 생각났다.


아,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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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였던가. 늦가을 밤, 나는 카이로 칸엔칼릴리 시장 어느 골목 카페에서 물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250년도 넘은 찻집 엘피샤위El Fishawi엔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과 그들을 겨냥한 행상들로 북적였지만 불편함보다는 즐거움이 더 가득해 보였다.


내 이집트 여행을 축복하는 민트차 향기는 몸과 마음, 추억을 꽉꽉 채우고도 비강으로 넘쳐 흘러나왔다.


이집트는 어릴 때부터 꽤 익숙한 나라였다. 새소년과 어깨동무, 소년중앙에는 가끔 '피라미드의 신비로움'과 '파라오의 저주' 같은 내용이 실리곤 했다.


구약의 애급埃及부터, 알렉산드리아, 상형문자, 나일강, 스핑크스 등이 늘 내 상상을 자극하던 이집트였다. 지리 시간엔 수에즈 운하를 배웠고 역사 시험지엔 카이로 회담이 등장했다.

낯선 듯 친근한 이집트에서 난 내 옛 추억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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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애굽기入埃及記라 해야할까. 영광의 탈출exodus가 아니라 즐거운 입국이었다.

하늘에서 본 카이로는 정말 컸다. 총길이 6671㎞의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의견이 분분하지만)이다. 한강(514㎞) 13개를 이어붙여야 비슷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자그마한 점들이 삼각주를 가득 메우고 있고, 차량들이 개미떼처럼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에 떠밀려, 난 누구보다 일찍 카이로의 새벽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이런 날씨란 말이지' 생각보다 서늘했고 상쾌했다.


무려 800만명이 모여사는 아프리카 최대도시 카이로. 하늘도 높다. 적어도 서울보다 파랗다. 낡은 차량들이 일제히 내뿜는 매연과 모래먼지도 청명한 날씨를 이기지 못했다. '첨탑(미나레트)의 도시'의 첫인상은 밝았다.

팔천년 전부터 벽에 얼굴을 새기고 돌로 쪼아온 전통이 내려온 까닭일까. 카이로 시민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사진 찍기를 허용한다.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다.


흉측하리만치 크고 시커먼 카메라 앞에서 위축대지 않고 가만히 기꺼히 포즈를 취한다. 무척 고마운 일이다.


물론 가끔 관광지에선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기자 지구 대피라미드 앞에서 낙타를 탄 사내와 계단식 피라미드 앞 나귀를 탄 노인은 꽤 근사한 피사체이지만, ‘직업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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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거대한 타임슬립 공간이다.

뭐든 몇 천년 전의 것이다. 최근에야 만든 것 같은 목조 부조 패널(헤지라의 묘벽)을 가리켰더니 가이드 하사닌은 4700년 전의 것이라 답한다.


이집트 박물관을 갔다. 페이스북 ‘알수도 있는 사람’처럼 무척 낯익은 투탕카멘 미라가 있는 곳이다.

수장고까지 포함, 총 15만 점의 전시물이 있는데 기본이 몇천 년 전이다.

구석에 있는 '곡물을 가는 여인상'은 BC2300년 전이니까 약 4300년 전, 제18왕조 제12대 파라오 투탕카멘(재위 BC 1361∼BC 1352)의 황금가면 역시 3300년 전의 것이다.


호주국립박물관에 있는 제임스 쿡의 런던왕립학회 메달(18세기) 정도는 기념품 가게에나 놓아둘 듯 하다.


전시물은 상상을 초월하도록 정교하다. 아마 당시 세계 최고의 공예술이 이집트에서 꽃을 피웠음이 틀림없다. 팔다리 근육이나 옷주름 역시 현대조각 못잖은 사실감이 살아있고 눈에는 흑수정을 박아 무생물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박물관 바깥 기념품 숍의 조악한 미니어처를 보자면 오히려 이집트인들은 반만년 전 조상들의 솜씨보다 퇴보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투탕카멘 묘를 에워싸고 지키는 아이시스 여신상. 진지한 그 몸짓과 엄숙한 표정은 물론이며 선명한 아이라인 눈 화장이 요새 유행 스타일 마냥 정교하다.


과거 교과서나 잡지에서나 보던 고대유물을 실제 앞에 두고 보니 눈과 귀에 쏙쏙 들어온다. 모조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방대한 전시물이 그냥 손 닿는 곳에 놓여있다.

문명의 역사를 만질 듯 가까이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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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은 주택가 언덕에 있었다.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다. 쿠푸왕, 카프라왕,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가 언덕에 우뚝 서있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Grand Pyraid 높이는 138m나 된다. 정말 각이나 변이 흐트러짐 없다. 천문학을 이용해 정확하게 피라미드의 모서리를 동서남북 사방위에 맞췄다.


안에는 왕이 잠든 석실과 부속실, 환기구, 도굴방지를 위한 가짜 길까지 있다. 230만개 가량. 하나에 40톤에 달하는 석재도 굉장히 단단한 화강암이다.

일대는 모두 사막이라 나일강이 범람할 때를 이용해 가져온 것이라니 정말 기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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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앞에는 스핑크스가 있다. 이 역시 유명한 유적이다. 수수께끼를 낸다는, 대포에 맞아 코가 부서졌다는 바로 그 반인반사半人半獅의 괴물상. 늠름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왕릉을 지키고 섰다.


밤에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에 조명과 사운드를 입힌 쇼를 진행한다. 입장료를 내고 안에서 봐도 좋지만 바깥

에 피자헛 건물이 있는데 이곳 3층에 자릴 잡아도 잘 보인다. 시점이 높아 멀리까지 보인다. 일명 '피자헛 뷰'라고 불린다.

커다란 수프림 피자와 제로코크, 담배까지 피우며 쇼를 관람할 수 있어 더욱 좋다.


멤피스 인근 사카라엔 계단식 피라미드가 있다. 인류 최초 건축가로 꼽히는 임호테프가 지었다는 계단식 피라미드(BC 2650년)가 있다. 현재는 재건축(?) 보수공사 중인데 그래도 비계를 제외하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피라미드를 직접 본 후 그 크기만큼 큰 감동을 받았다.


자연물이 아닌 인공물, 그것도 반만년 전에 지은 건축물 따위를 보고 마음을 뺏기긴 처음이다. 더이상 다단계 회사를 피라미드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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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는 유명한 인공 토목물이 하나 더 있다. 피라미드를 지은 후 4000년이 지난 후에 완성된 수에즈 운하다. 1869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물길로 이어졌다.


곤드와나 대륙이 해체된 후 생겨난 특유의 지형상, 옛사람들도 운하의 필요성을 느꼈다.

BC 1380년 로마인들은 범람한 나일강을 통해 홍해로 배를 띄웠다. 이후에도 몇 번의 시도는 있었지만,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170㎞ 물길을 파낼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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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프랑스인들이 운하를 개통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던 뱃길이 열흘 이상 단축됐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과 결탁한 영.불이 수에즈 운하를 열어주지 않자 러시아 발틱함대가 남아프리카 희망봉까지 뱅 둘러 가는 바람에 전력을 소모해 제국주의 일본 도고 제독에 대패했다는 얘기도 있다.


수에즈 운하는 길다. 카이로에서 차를 달려 운하 중심도시 이스마엘리아까지 갔다. 넓은 운하가 펼쳐지고 멀리 시나이 반도 땅까지 보인다.

해운 산업시설이지만 요트가 떠있는 풍경은 꽤나 낭만적이다. 몇 년 전 35㎞ 구간에 걸쳐 교행이 가능하도록 확장했다.

컨테이너 화물선이 수에즈운하를 지나려면 보통 60만~100만 달러를 내야한다. 이집트 정부의 큰 수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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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성쇠의 역사를 오롯이 지켜온 카이로 곳곳엔 볼거리가 가득하다. 구도심 시타델과 수천년 역사를 이어온 칸엘칼릴리 시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12세기 말 십자군에 맞선 요새로부터 출발한 시타델(Citadel)은 카이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했다. 700년간 왕궁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과거의 영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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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도 멋지다. 영화 속 근대 시장의 모습이다.

토끼굴처럼 구불구불한 길마다 사람과 정이 넘쳐난다. 향신료를 사러온 무슬림 주부, 빵을 구워파는 청년, 심부름하는 아이에 뭐든 찍어대는 관광객까지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곳이다.


진심으로 반기는 눈짓과 '엄지척'을 내보이는 이집트 국민이 이 안에 산다.

사회를 이룬 인간이 비로소 문명을 만들기 시작한 곳, 이집트.


사람은 정겹고 그 역사는 유구하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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