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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대구" 내 살같은 도시에게,

화창한 대구의 봄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 나는 춘래불사춘

by 이우석 더 프리맨
방에 갇힌 일요일이었다.
보잘 것 없고 뭔가 더 특별할 것도 없는 지루한 뉴스를 주입당하다
‘문득’ 대구에서의 화창한 날을 떠올렸다.
잘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 대구를 역병의 창궐지 정도로만 기억할까. 그게 두려웠을까? 나는 내가 아는 대구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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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란 어떤 곳인가. 달구벌, 영남대로의 중심지,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다.

대구大邱의 옛 이름은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다.

발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사실은 대구를 부르던 순 우리말을 빌려 표기하다 대구와 달구벌 등으로 정착됐다.

달은 크다는 듯, 즉 대大이고 거기에 언덕 구가 붙었단 말이 가장 설득력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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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예전에 어떤 곳인가. 갑자기 생겨난 고을인가. 아니다. 유구한 역사를 품었다. (대구는 수도가 두번 될 뻔했는데 한번은 신라 신문왕이 689년 대구 천도를 시도한 것이고, 또 한번은 한국전쟁 당시 잠시 임시수도로 대구를 삼았던 역사다.)

장보고 군이 신라 관군을 상대로 20배 병력을 격파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달벌대전, 즉 대구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대구는 지리적으로 대대로 영남의 중심지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1419년 대구현·수성현·해안현·하빈현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했다. 1466년엔 대구도호부로 승격됐다.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대구에 들어섰다.

철도가 들어서기 전까지 대구는 영남에서 작은 도시였다. 경주와 상주를 두고 경상도라 했을 정도. 진주보다도 작은 읍락이었다.
경상감영은 성주의 속현 팔거현, 대구도호부, 안동대도호부 등에 돌아다니며 적을 두었다.
대구가 지리적으로 경상남북도의 정중앙, 그리고 육로와 수운, 나중에 생겼지만 철로의 중심지였던 까닭이다.


일제강점기가 끝나던 1940년대 대구는 서울, 평양, 부산, 인천에 이은 다섯 번째 큰 도시였다.

대구는 북쪽 팔공산 산맥과 남쪽 비슬산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 평야지대다. 그래서 덥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분지란 요강 분盆을 쓰는 오목한 지형으로 바람이 거의 불지않아 뜨거운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는단 뜻이다.

지형은 평평하다. 고대부터 연못이 많던 곳이라 사실 무른 땅이 많다. 지형 중 못pond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은 개발사업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성당못, 감삼못 등이 남아있다. 참고로 가장 유명한 수성못은 나중에 생긴 인공못이다.

지금도 대구 습지는 전국 최대 두꺼비 맹꽁이 산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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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처럼 학연 학벌 따지는 데도 드물다. 대구 사람은 교육열이 뜨겁기로 소문났다.
쟁쟁한 조직 가운데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경북고, 대구상고 등 지역 명문고가 많기로 소문났다.
지금은 수성구가 대구 향학열(본인이 원하든 아니든) 메카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전국 1, 2등급 분포비율에서 강남구, 서초구에 이어 3위를 차지했는데 2위 서초구와도 거의 차이가 없다.
지난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전국 만점자 29명 중 서울 강남구 은광여고와 함께 수성구 경신고등학교가 4명을 공동 배출했다.
그래서인지 대구 수성구는 전국에서도 집값 상승지수가 높기로도 유명하다. 전국 톱클래스에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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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규모도 서울, 경기도에 이어 3위였다.

근대에 들어 대구는 ‘한국의 밀라노’라 불릴 정도로 섬유 산업이 전국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일찍이 쇠퇴한 노동집약적 산업 동향에 따라 딱히 내세울 산업이 지금은 없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비롯해, 제일합섬과 다양한 기간산업이 발달한 영남의 중심 산업도시였다.

‘돈이 도는 동네’였다.


지방에서 가장 굳건한 백화점 유통업을 비롯해 청구건설 우방주택 등 쟁쟁한 건설사가 달구벌을 지켰다.

전국 16개 지자체 평균 자산 중 대구광역시는 서울 다음으로 평균 자산이 높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지금도 전국에서 유일한 지역 로컬 백화점 ‘대백’ 대구백화점이 도심 상권을 지탱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그동안 산업은 없었는데 돈이 돈다.

이유는 대구가 바로 영남의 독보적인 중심지였던 까닭이다. 구미에서 포항에서 돈을 벌면서 대구에 와서 사는 이들이 많다.

안동 상주 등 먼 곳을 제외하고 경북 지자체 공무원 중에는 대구에 집 한 채씩 가지고 통근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소비하는 도시가 바로 대구다.

이젠 대구국가산단을 통해 전기차 등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많은 기업을 유치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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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사람들은 보수적인 듯 하지만 사실 많이 열려있다. 새로 건물을 짓고 싹 뒤집어엎고 재개발하는 것보다 옛집이나 물건의 그 가치를 선호하지만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대구 중심부 식당과 카페를 가보면 서울 이상으로 호화찬란하다. 외국을 다녀온 유학생도 많아 에스닉푸드나 정통 북미 유럽 스타일 퀴진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붉은 음식’으로 대표되는 대구의 음식문화도 발달했다. 여름철 무더운 지역답게 맵고 얼큰한 맛의 음식군이 대구를 지탱하고 있다.
육개장이니 복불고기, 떡볶이, 무침회 등을 비롯해 막창, 치킨 등이 유명한 대구 음식이다.
특히 교촌치킨, 땅땅치킨, 호식이 두마리 치킨 등은 대구 명물이 전국적 프랜차이즈화된 경우다. 뉴욕통닭 원주통닭 동문통닭 등 이름난 치킨집도 많다. 치맥이 대구에서 출발했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치킨집들이 대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아쉽지만 대구광역시의 시조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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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제목처럼 '빨간 나라'. 대구는 매콤한 도시다.

붉은 육수가 강물로 흘러내리고 가로수엔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는 그런 곳.

모두가 매일 붉은색을 섭취하고 산다.

아마도 대구 사람들은 지장을 찍고 나면 무심코 인주를 빨아먹을지도 모른다.


붉은 음식이 붉은 마음을 만드는 지, 붉은 단심(丹心)이 절절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이 가장 먼저 일었고, 3.1만세운동, 10.1 저항운동, 4.19혁명의 불길 역시 대구에서 맵도록 일어났다.


내당동 반고개 무침회 골목엔 15여 곳이 성업중이다. 무침회. 회무침이 아니고?. 대구와 경북엔 이런 식 이름이 많다. 갈비찜이 아닌 찜갈비, 닭찜 대신 찜닭. 어순이 다르다.

유림(儒林)이 많은 영남이라 한자를 쓰기 좋아해서 그럴 것이다. 볶음밥(炸飯), 자장면(炸醬麵)처럼 한자는 조리법이 재료 앞에 들어간다.

가오리, 가자미 등 선어는 물론, 오징어 소라 우렁 등 데쳐낸 생선과 어패류에 초고추장 무채 미나리 등 양념을 듬뿍 넣고 칼칼하게 무쳐낸 것이 무침회다. 매콤새콤한 양념을 즐기는 이들에겐 딱 맞는다.

대구식 납작만두에 싸서 먹으면 기름맛이 더해져 좋다. 마지막으로 양념에 밥을 비벼야 한다. 양념이 뜨거운 밥과 만나 식사의 절정을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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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서 만두로 진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납작만두는 곳곳에서 맛볼 수 있다.

쫄면이나 양배추무침, 무침회를 싸서 먹으면 기름기가 매운 기운을 걷어내줘 한결 풍성한 맛이 난다.

만두로 보면야 소가 거의 없어 옹색하지만 전으로 보면 푸짐하다.

미성당이 유명하지만 교동시장 먹자골목도 인기다. 이곳엔 '양념오뎅'도 판다. 짙붉은 양념에 찰박찰박 담긴 양념오뎅은 이미 부산의 그것과는 또다른 존재감이다.


"천천 이천"으로 주문이 끝나는 범어동 윤옥연 할머니 떡볶이집에도 추가 양념을 놓아 둔다. 그냥 고추장처럼 보이지만 뭔가 특별한 비급이 숨었다. 조금만 넣어도 퍽 매워진다.

분식과 주전부리 등 'B급 미식'의 도시로 유명한 대구는 맛있는 만둣집도 많다. 시내 태산만두와 영생덕이 유명하다. 두 집 모두 화상(華商)이 운영하는 집이다.

태산만두는 얇고 부드러운 만두피로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많다. 특히 바삭하고 존득한 피 속에 육즙 흥건히 넘치는 소를 채운 군만두가 시그니처다.

영생덕은 찐교스(찐 교자만두)와 고기만두, 물만두가 맛있다. 한눈에도 푸짐한 고기만두(왕만두)는 옛날 맛이라 집어들면 벌써 푸근하고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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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을 팍팍 졸여낸 듯한 음식인 야끼우동이나 그보다 더 졸인 다음 밥을 비벼먹는 중화비빔밥도 대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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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사실 내 고향이다. 나는 대구시 서구 내당동에서 났으며 ‘모과나무집’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이사해 지금은 경기도에 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방학 때면 대구를 갔었다. 홀로 북성로 큰집을 가고 신천동 외갓댁도 대번에 찾아갈 수 있을만큼 십 수년 기억의 누적으로 익숙한 곳이 대구다.

비록 서울 경기권을 전전하고 있지만 ‘내살 같은’ 고향 대구가 빨리 훌훌 털고 병상에서 벌떡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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