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멸치가 뛴다, 봄이 살아 펄펄 뛴다.

물속에 피어난 기장의 봄

by 이우석 더 프리맨
“탕탕” 봄이 펄펄 뛴다. 은빛 살점이, 굵은 땀방울이 튄다.
검푸른 바다로부터 끌어 올려진 그물을 부여잡은 어부들이 구성진 구령 소리에 맞춰 팔을 펼치면, 사방팔방 은빛 생명이 튀어오른다.


살점은 은비가 되어 내리고 바람에 그을린 어부의 검은 얼굴에, 핏줄돋은 팔뚝에 내려앉는다. 어부도 멸치도 모두 강인한 생명체로서 서로 만나는 마지막 순간이다.

펄펄 뛰던 생명력이 마지막으로 발하는 고혹스러운 광택. 그생을 마감하는 순간 세상에 보여주고픈 그들 만의 몸사위다.


어부의 굵은 땀방울과 함께 퍼져나가는 봄 멸치의 마지막 쇼는 노을 속으로 슬며시 꺼져버리고, 세상이란 무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막을 준비한다.

"올해는 메루치(멸치)가 밸로(별로) 없네예…" 어구를 챙기던 어부는 빈 그물이 밉고 야속하다.
수온은 제법 따땃해졌다지만 멸치잡이 어부의 만선 꿈은 오늘도 영 신통찮다. 봄꽃 소식과는 달리 봄 바다엔 아직 멸치 꽃이 피어나지 않았다.
해풍에 검게 그을린 어부의 눈에 멸치는 어느 봄꽃보다 곱다.
허나 봄을 향한 미로의 끝은 아직 남쪽으로 향해 있다는 것만큼은 꽤나 분명하다.
흐드러진 이팝 꽃처럼 남쪽바다 푸른 물속엔 멸치떼가 곧 흩날릴게다. 깊게 팬 입가 주름 속으로 파고든 봄 바람처럼 어느새 다가온 줄도 모르게. 분명히.

부산을 시계 반대쪽으로 돌면 기장(機張)이 나온다. 남해에서 동해로 가는 길목이다. 기장군은 천혜의 해산물 자원과 군사적 요충지를 가진 항구로 옛부터 번성했다.


이곳에 만춘의 전령사 멸치(멸어·蔑魚)가 있다. 이름하여 대변(大邊)항. 이름이 주는 이상한 뉘앙스(?)와는 달리 맑고 고운 물을 담뿍 담은 오목한 항구다.

4월 대변항에는 날마다 누군가 멋진 솜씨로 제련한 은빛 고기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튀어오른다.

이 맛있는 풍경을 보기 위해 매년 이맘 때면 많은 출사객과 관광객이 멸치 떼처럼 몰려든다. 바다가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오후 4시부터 멸치조업을 나섰던 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들어온 배는 곧장 유자망 그물에서 멸치를 털어내는 '멸치털이' 작업을 하는데 장관이다. 만선이 되어야 이 장관을 볼 수 있기에 정말 은처럼 귀하기도 하다.


해는 저물고 멸치배의 시동도 꺼졌지만 살점 보드라운 멸치는 내일의 따가운 햇살에 미라가 되어 또 다음 세상을 만날 준비를 한다.

5월까지 가장 맛이 좋다는 봄 멸치가 기름 방울을 떨구면 치익 흰 연기를 피워올리며 근사한 향기를 사방에 풍긴다. 석쇠에 올리면 지방이 흘러나왔다가 다시 보드란 살 속으로 스며들어 고소한 맛을 낸다. 명품 앤초비처럼 고소하고 보드란 그 식감은 최상급 치즈같다.

밥상 위 국과 찌개 속에서 깊은 바다 맛을 내준 멸치는 멋진 생의 책임을 다하고 사라진다. 우린 무심코 뜬 국 한술을 두고 멸치의 은덕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원래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릴 만큼 명품으로 소문난 기장 멸치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회(무침)로도 먹고 구워도 먹는다. 회를 떠서 싱싱한 봄 채소와 함께 무쳐놓으면 보기만 해도 그렁그렁 침이 고인다.


청어 과메기처럼 기름 많고 가무잡잡한 색 멸칫살이 눅진한 치즈처럼 혀 위에서 슬슬 녹아든다. 채소는 놔두고 살만 골라먹어도 비린내가 없을 정도로 싱싱하다.

찌개도 좋다. 배초향(방아잎)을 넣어 청량한 맛을 낸다. 미나리 등 봄 채소를 한 가득 넣으면 그야말로 봄이 한가득 냄비에서 끓는다.


기장의 봄이란 참 입맛 다시게 만든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고작 한달, 이후 7개월이나 굴 생각만하며 살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