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쌀과 밥을 향한 러브레터
짓다, 쌀과 밥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중요시 여기는 것엔 ‘만들다’가 아니라 굳이 ‘짓다’라는 동사로 구분했다.
시와 소설, 노래 등 글은 ‘쓴다’하지 않고 ‘짓는다’ 했다. 농사도 짓는 것이며 옷이며 집 등 의식주는 죄다 ‘짓는’ 것이었다.
(울 엄마와 농부, 패션디자이너에게도 ‘지은이’ 호칭을 허하라!)
‘밥’ 역시 마찬가지다. 생명만큼 소중한 밥은 ‘지어먹는’ 것이었다.
쌀이란 말 자체가 인도로부터 전래됐다는 설도 있지만, 콜린 렌프류는 저서 '현대고고학의 이해(Archaeology:Theories, Methods and Practice)'에서 쌀이 한반도(청주)에서 기원했다고 썼다.
어차피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고대 쌀(갈대와 닮은)일텐데 그 기원이 어딘들 어떨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쌀이 오랜 시간을 한민족과 함께 해왔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생명줄같은 쌀이나 곡식을 감히 산다고 하지 않았다.
쌀을 사러가면서도 ‘판다’고 했다. 반대로 쌀을 돈으로 바꿀 때는 외려 ‘산다’고 했다. 은어가 아니다. 국어사전에 당당히 등재되어 있다.
경외로운 쌀 앞에서 짐짓 정반대로 바꿔 말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지금 분명한 사실은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나날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만해도 국민 1인 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에 이르렀다. 10년 후에 65.8㎏(2018년 기준)에 불과했다. 33년 전인 1985년엔 128.1㎏이었다.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국내 쌀 생산량은 2018년 기준 약 397만 톤이다. 증산 혁신 이후 생산량은 크게 변화가 없지만 소비에서 큰 폭으로 줄고 있어 나머지는 재고로 남는다.
지금 가장 화두는 프리미엄 쌀이다. 소비량은 감소한 대신 고급 쌀을 즐기는 문화가 생겨났다. 한국인은 이제 새로운 밥을 '짓고' 있다.
밥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쌀밥이 기본이다. 쌀로 지은 밥이 아닌 것엔 보리밥이니 잡곡밥이니 따로 곡물 명을 붙였다. 콩이 몇 알만 들어가도 콩밥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쌀은 밥을 짓는 최상의 곡물이며, 품종이 다를 뿐 이는 동북, 동남아시아에서도 똑같은 '쌀밥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국인의 식미(食米) 트렌드는 바로 프리미엄 쌀이다. 1인 가구 증가와 욜로(YOLO) 문화 전파 등으로 ‘한끼라도 맛있는 밥을 먹자’는 소비 패턴이 확산되며, 밥맛 좋고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고급 품종의 쌀로 소비 이동이 이뤄지고 있다.
생산지와 시장도 이같은 소비자의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고급 쌀을 내놓고 있다.
과거 증산이 국가적 목표였던 시절엔 많이 수확되는 쌀 품종을 재배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1960~70년대 쌀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는 장립형 인디카와 단중립형 자포니카를 교배한 '통일벼'를 고안해냈다.
최초 유명 브랜드 통일벼는 단위 포기 당 수확량이 많았지만 추위와 병충해에 약하고 맛이 떨어졌다.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으로 외면받았다. 2000년대 들어선 거의 생산하고 있지 않다.
풍요가 관건이던 시절을 보낸 후 밥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통일벼가 사라진 2000년대 이후 '일반미'는 밥맛이 좋아졌다. 새누리미, 추청(아키바레), 신동진,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밀키퀸 등 맛과 생산량을 개선한 다양한 국내외 품종이 등장했다. 맛드림, 칠보, 오대쌀, 하이아미, 금탑, 황금벼, 영호진미, 삼광, 호품, 현품, 청품 등 수많은 품종의 맛있는 쌀이 우리 식탁에 올랐다.
원래는 지역을 따졌다. 이천쌀, 김포쌀 철원쌀 등 유명 생산지가 곧 인기 브랜드였다. 강화나 화성 등에서 생산된 쌀은 싸전에서 '경기미'로 구분해 팔았다. 현재 지리적 표시제에 강원 철원, 경기 이천, 여주, 김포, 안성, 전북 군산, 전남 보성 웅치면, 진도(흑미) 등이 등록되어 있다.
품종엔 관심이 덜했다. 지역 기후와 토양이 맛있는 쌀을 낸다는 생각이었다. 한때 강남 부자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미국 쌀 칼로스(캘로즈)로 밥을 짓는다는 말도 돌았다. 생산지인 캘리포니아가 청정지역이라 맛이 더 낫다는 설명도 붙었다.
시간이 흘러 토양 뿐 아니라 품종과 도정, 수분율까지 따지며 밥의 맛과 기능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졌다. 프리미엄 쌀만 판매하는 쌀집은 물론, 맛있는 품종 용 전기밥솥도 따로 나왔다.
어떤 것을 프리미엄 품종이라 부를까. 보통 쌀 맛은 향기, 찰기, 경도에 따라 우수 등급을 매긴다. 대다수 한국인의 입맛은 차지고 부드러운 쌀을 선호한다. 그러려면 단백질과 아밀로스 함량이 낮아야 한다. 단백질은 쌀을 딱딱하게 만든다. 눈으로만 구분할 때는 쌀알이 투명하게 보여야 좋은 품종으로 취급받는다.
그래도 알쏭달쏭할 때는 포장지 마크를 확인하면 도움이 된다. 쌀 품질 관리 품질인증마크는 GAP이나 지자체 단체장 인증마크, 쌀품종명 관리마크 등이 있다.
농촌진흥청은 단순히 쌀맛보다 좀더 복잡한 기준으로 '벼 최고품질' 품종을 선정하고 있다. 생산자 입장이라 병충해 저항성과 수량성 등을 고려해 등급을 매긴다. 농진청이 개발한 밥쌀용 벼 품종 285개 중에서 최고품질은 삼광, 운광, 고품, 하이아미, 영호진미 등 14품종(지난해 8월 기준)이다.
밥맛을 중심으로 평가한 '밥맛 좋은 품종'에도 단백질 함량 6% 미만인 삼광, 하이아미, 영호진미, 해품, 수광 등을 추천했다. 양곡관리법에는 도정된 쌀 등급을 포장재에 의무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특·상·보통 등급으로 나눠 표기한다.
매년 매출 신장하고 있는 인기 프리미엄 쌀 품종에는 골드퀸, 백진주, 진상, 오대쌀, 신동진 등이 있다. 저마다 다른 특징으로 입맛을 공략한다. 다만 오래둬도 밥이 변색되지 않고 군내가 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백질과 아밀로스 함량이 낮기 때문이다.
골드퀸 계열은 향기가 좋다. 전기밥솥에 지어도 솥밥처럼 구수한 향을 내는 골드퀸 3호는 재래 종 향미를 히말라야 벼와 교배해서 개발한 품종이다. 조선향미(米), 월향미, 수향미 등 각각 브랜드로 시중에 나와있다.
백진주는 일반 쌀에 비해 찰기가 훨씬 좋다. 아밀로스 함량이 낮은 품종이기 때문이다. 찹쌀밥처럼 쫀쫀해 이같은 맛을 선호하는 소비자에게 인기가 높다.
경기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는 고시히카리 역시 아밀로스 함량이 낮다. 대충 지어도 찰기가 좋고 윤기가 흐른다.
신동진은 쌀알이 크고 굵다. 1,3배에 달해 눈으로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씹히는 맛이 좋아 국에 말아도 쉽게 퍼지지 않는다. 하이아미는 아미노산이 풍부한 품종이다. 성장기 건강에 좋다는 마케팅 덕에,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 소비자에게 인기다.
오대쌀은 오대산 쪽에서 자란 것이 아니다. 철원 양구 등 강원도 비무장 지대에서 주로 재배해 깨끗하다는 이미지로 각인됐다.
맛 뿐아니라 특정한 성분을 넣거나 뺀 기능성 쌀도 프리미엄 쌀 대열에 합류했다. 바나듐을 함유해 당뇨증 환자에게 좋은 혈당강하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곤약혼합미 등이 대표적 기능성 쌀이다. 일반 쌀에 비해 2~3배 비싸다.
품종 뿐 아니다. 소비자들은 신선도까지 꼼꼼히 따진다. 신선도는 도정일자를 통해 알 수 있다. 쌀은 도정 직후부터 수분이 날아가며 맛이 떨어진다. 도정을 하고 나면 바로 산화가 진행된다. 일주일 이상이면 산폐가 시작된다. 못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맛은 떨어진다. 신선도는 좋은 품종 못잖게 밥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따라서 도정일자가 얼마 안된 좋은 품종의 쌀을 소용량 단위로 구입한다. 프리미엄 쌀은 10~20㎏ 들이로 구입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큰 포장으로 구입하면 아무래도 빨리 소비하기 어려워 나중엔 신선도가 떨어진 쌀을 먹어야 한다. 즉석 도정기를 설치해 소량씩 구입할 수 있도록 한 쌀집은 진작 생겨나 인기를 끌고 있다. '쌀 소믈리에'나 '쌀 블렌더'가 소비자에 맞춰 추천하는 프리미엄 쌀집도 생겨났다.
향후 프리미엄 쌀 시장은 '용도별' 시장으로 세분화 될 전망이다. 밥짓는 용도에 따라 볶음밥용, 덮밥용, 국밥용, 리조토용 등이 등장할 지도 모른다.
먹거리에 쌀쌀맞은 현대인이라지만 프리미엄 쌀은 새로운 맛으로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제 새로운 쌀로 지은 밥은 현대인의 몸과 혀에 여태껏 없던 감동과 행복을 채울 태세다. 1970년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고 서영춘)이 노래했던 것처럼.
문제는 이렇게 고급쌀에 도정까지 지켜서 지어놓고, 바로 스테인레스 공기에 담아 꾹꾹 눌러버리면 아무 소용없다.
뚜껑에 눌리고 물이 생긴 밥이 뭐로 지은들 맛있을까. 밥은 빵이나 전과 마찬가지로 금방 지어 퍼내야 맛있다. 최소한 미리 담아놓지만 않아도 좋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한국인은 밥을 맛있게 짓기를 원하지만 결국 가장 맛이 떨어지게 담아 먹는다.
이게 다 전두환의 '스뎅 공기' 탓이다.(규격화된 스테인레스 공기는 1984년 주문식단제 시행으로 등장했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