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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고기는 육회부터 시작한다

[푸드로지] 인류 최초의 식문화, 날로 먹기 좋은 날

by 이우석 더 프리맨


0002472440_001_20210527111103523.jpg?type=w647 육회는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조리법이다. 대구 송원구이 뭉티기

■ 선사인류부터 즐겨온 육회(肉膾)
구운 고기 먹기전 입맛 돋워줘 저지방 부위 사용 단백질 풍부
빈혈에 특효… 면역력 높여줘. 호남선 닭 근위·가슴 저며먹어
伊, 소에 오일 등 뿌린 카르파초. 獨선 돼지에 후추 양념한 ‘메트’
日 규슈 지방선 말고기 ‘바사시’. 세계 각국에 다양한 육회 문화


야구 경기와 고기는 육회부터



인류가 먹은 최초의 요리(?)는 회다. 회(膾)는 칼로 저민 날고기나 날생선을 그대로 먹는 음식 문화로서 사실은 육회(肉膾)를 뜻하는 단어다. 수렵·채취·어로 생활을 하던 선사 인류가 먹던 방식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 형태로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문헌에 ‘식재료’로서 회가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고대 중국으로, 춘추전국시대 공자와 관련된 것으로 나온다. 논어 상론의 향당에는 공자의 생활 습관을 설명하며 ‘찧은 쌀밥과 가늘게 채 썬 회를 즐겼다(食不厭精 膾不厭細)’고 기록했다. 이게 벌써 2500 년 전쯤이다. 사람의 입(人口)에 즐겨 오르내린다는 회자(膾炙)란 말도 생겨났다. 날고기와 구운 고기란 뜻이다. 얼마나 맛이 좋고 입에 당겼으면 ‘회자’라 썼을까.



0002472440_002_20210527111103545.jpg?type=w647 서울 무교동 ‘참숯골’의 한우육회비빔밥, 서울 동대문 ‘허파집’의 육사시미, 전남 무안 삼향읍 ‘도청한우’의 한우 암소 생고기, 경기 파주 금촌동 ‘고도05’의 캐비아육회


지금이야 회라 하면 생선회를 먼저 떠올리지만 원래는 들짐승이나 날짐승, 가축, 가금류의 날고기를 가리켰다. 회(膾) 자의 한자 부수(月·고기 육월)를 보면 알 수 있다. 꿩부터 소, 말, 염소 등을 그대로 썰어 먹었다. 그러던 것이 훗날 생선회가 회를 대표하고 육고기 회는 따로 육회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신기하게도 중국에서 융성했던 회 식문화는 송대 이후 홀연 사라지고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전통 식문화로 계승되고 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페루 등에도 동아시아의 생선회와 같은 식문화가 있으며 육회 식문화는 유럽에서 타르타르 스테이크, 카르파초 등의 이름으로 명맥을 지켜오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먹는 회를 보면 생각보다 다양하다. 이탈리아의 카르파초(carpaccio)는 쇠고기 살을 얇게 잘라내 올리브오일과 레몬즙, 후추 등을 뿌려내는 일종의 샐러드다. 소고기뿐 아니라 사슴고기(Venison), 문어, 생선살도 많이 사용한다. 명성에 비해 그리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1950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바(bar)에서 처음 생겨났다. 올해로 칠순을 갓 넘긴 카르파초의 탄생이다.


독일은 돼지고기를 생으로 갈아 후추 양념을 한 메트(mett)를 빵에 발라먹고, 터키와 중동 일부 지역에는 양고기를 갈아서 향신료를 첨가한 키베 나예(kibbeh nayyeh) 같은 샐러드 요리가 있지만 형체가 없다는 점에서 육회와 비슷하진 않다. 차라리 태국의 코이 소이(koi soi)나 베트남의 보타이찬(botai chanh)이 더욱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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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회 형태로서 역사가 오랜 것은 타르타르 스테이크(tartar steak)다.

13세기 유럽을 침공한 몽골군의 한 부족인 타르타르족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와 독일, 동유럽에서 즐겨 먹는 이 음식은 신선한 소고기를 다져 양념을 하고 뭉친 다음, 그 위에 달걀노른자를 얹어 먹는 것이 우리네 육회와 똑 닮았다. 특히 체코의 타타락(tatarak)은 마늘을 잔뜩 곁들인 육회 요리로 그 맛까지 비슷하다.


전쟁 중에 어쩔 수 없이 생고기를 먹었던 타르타르족은 말고기 등 가축의 날고기를 안장 밑에 깔아두고 달리다 식사 때가 되면 썰어 먹었다. 장거리 원정 중 초원에서 불을 구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이것이 헝가리·체코 등 동유럽으로 퍼졌다가 새로운 식문화로 정착했고, 일부는 그대로 불에 익히는 등 레시피의 변형을 거쳤다. 독일 함부르크(Hamburg)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가 햄버거(hamburger) 스테이크의 기원이 됐다는 것도 이 타르타르 스테이크다.


일본 규슈(九州)에도 말고기를 육회로 즐기는 바사시(馬刺し) 식문화가 있는데 사실 이는 한반도에서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했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울산왜성에 갇혀 있을 때 식량이 떨어져 말을 잡아먹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회 문화가 발달하기로는 대한민국이 제일이다. (인간에게 불을 전해줬다는) 프로메테우스가 섭섭해 울고 갈 노릇이다. 우리에겐 생선회와 어패류를 날것으로 먹는 다양한 식문화가 있으며 두릅회 등 채소에도 회라 이름을 붙여 즐긴다. 이름도, 종류도 많다. 타르타르 스테이크와 닮은 육회가 있고, 뭉텅 썰어낸 뭉티기(영남), 넓적한 생고기(호남)가 있다. 일본 생선회의 이름을 가져다 ‘육사시미(肉刺し身)’라고도 부르고 울산에선 ‘막찍기’라고도 한다. 도축 즉시 지방과 힘줄을 떼 낸 홍두깨나 우둔살, 사태, 채끝 등을 저며 먹는다. 하루 정도 숙성시켜 찰기를 더한 방식도 있다. 간과 처녑은 원래 익히지 않고 먹는다. 보통은 산패하기 쉬운 기름을 제거하고 살코기만 먹는데, 때론 지방 있는 부위도 그대로 먹는다. 지방층이 두꺼운 차돌박이도 회로 즐기는 경우가 있다.

이미지_닭가슴살회 광양.JPG

심지어 호남 일부 지역에선 닭도 근위(모래집)와 가슴살을 그대로 저며 먹는다. 토종닭을 주로 쓰는데 백숙이나 구이를 주문하면 가슴살 육회를 살짝 양념에 무쳐서 낸다. 살코기밖에 없는 가슴살 부위는 익힌 것보다 오히려 부드럽고 달달해 먹기 좋다. 일본에도 도리와사라 해 겉면만 익힌 닭고기 육회가 있지만 그리 대중적이진 않다. 대신 한국식 육회가 인기다. 현재는 2011년 식중독 사고로 모든 고기 요리를 겉면이라도 익혀서 내야 하지만 한때 이름까지 그대로 한 유케(ユッケ)란 한국식 육회 메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육회는 요즘처럼 선선하고 딱히 불판 앞에 앉기 싫은 기후에 더욱 선호도가 올라간다. 고깃집에서 애피타이저(전채요리) 격으로 가장 먼저 즐기는 메뉴가 육회다. 기름진 구운 고기를 먹기 전 싱싱한 육회를 맛보면 입맛이 당장 살아나는 덕분이다. 그래서 ‘야구와 고기는 육회(6회)부터’란 말이 생겨났다.


생선회처럼 넓게 뜬 육회는 고추장을 찍어 먹거나 참기름 소금장을 곁들여 낸다. 잘게 저민 육회는 살짝 양념해 그대로 먹으며, 비빔밥에 올리는 고명 중 최고 식재료로 꼽힌다. 생고기는 우선 저지방 부위를 주로 쓰는데 우량한 단백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으며 무기질·철분·비타민 등 필수영양소가 많아 면역력 증강에 좋다. 빈혈 등에도 특효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더 더워지기 전에 체력 보강을 위해 신선한 고기 살점을 씹노라면 그 충만한 영양으로 봄볕에 처진 기운이 펄펄 살아날 듯하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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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허파집 = 일명 ‘종삼(종로3가) 먹자골목’의 오랜 선술집이다. 탑골공원 담장을 따라 허름하고 맛좋은 집들이 줄을 섰는데 이 중 생고기(메뉴엔 육사시미라 써 있다)와 육회, 등골, 간처녑 등 특별한 부위 날고기로 유명한 집이다. 초저녁만 돼도 테이블 예닐곱 개가 어김없이 채워지고 모두 앉아 날고기를 먹고 있는 풍경이 경이롭다. 물론 지글지글 구워 먹는 구이 메뉴도 다양하고, 상호에 장기 이름이 박혀 있을 정도로 시그니처 메뉴로 꼽히는 허파탕도 칼칼하니 좋다. 서울 종로구 종로17길 26. 생고기 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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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숯골 = 한우육회비빔밥이 있는데 각종 채소와 나물이 그득한 사발이 꼭 작은 식물원 같다. 빼곡한 식물 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분홍빛 한우 육회. 고추장과 밥을 넣고 쓱쓱 비비면 숨이 죽어 비로소 익숙한 비빔밥이 된다. 아삭한 생채소와 부드러운 육회가 밥알에 섞여들면 그 한 숟가락에 다채로운 식감이 팔레트처럼 펼쳐진다. 서울 중구 무교로16 대한체육회관 2층. 1만6000원(정식 1만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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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한우 = 생고기인데 흔한 생고기가 아니다. 차돌박이까지 떡 얹어줄 때도 있다. 두툼한 한우 암소 생고기는 특유의 감칠맛이 가득하고 차돌박이는 씹는 맛이 좋다. 불판이 어디 갔냐고? 그냥 집어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된다. 한판 깔아주면 주섬주섬 집어먹고 드디어 구이로 전환한다. 차례로 맛볼 수 있도록 세트메뉴도 준비했다. 이름난 고깃집답게 늘 많은 손님과 신선한 고기가 오간다. 반찬으로 소문난 전남이라 한 상 떡하니 차려낸 갖은 안줏거리도 최고다. 전남 무안군 삼향읍 오룡2길15. 4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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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구이 =50여 년 전 대구 원도심 향촌동에서 시작한 뭉티기는 국내 생고기 식문화의 정점에 올라 있다. 경북 지방에서 소 도축 즉시 뭉텅뭉텅 잘라 먹은 데서 유래했다. 대구 중심가 동성로에서 자리를 지켜온 송원구이는 노포 소고깃집이다. 특히 신선한 뭉티기가 맛있다고 소문났다. 당일 도축 생고기를 사용하며 고기의 차진 식감과 자체 제작한 특제양념이 일품이다. 마늘과 고춧가루, 참기름, 액젓 등을 절묘한 비율로 배합해 감칠맛 넘치는 붉은 살점에 풍미를 더하고 깔끔한 뒷맛으로 맺어 양념맛으로 뭉티기를 찾는 경우도 많다. 대구 중구 중앙대로 398-4. 5만 원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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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05= 금촌역 인근에 이처럼 ‘핫’하고 ‘힙’한 술집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수제요리와 함께 전통주를 판다. 생고기 종류로는 캐비아 육회와 뭉티기 감태가 있다. 캐비아와 수란 등 두 가지 ‘알’을 곁들인 육회는 깍둑썰기라 씹는 맛이 좋고 그리 달지 않은 양념은 안주로 딱이다. 타르타르 샐러드 느낌이지만 풍미가 좋아 고도주(高度酒)에 곁들일 메인메뉴로도 그만이다. 경기 파주시 번영로20 IN0프라자 105호. 2만5000원,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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