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로지] 집에서 하는 외식, HMR과 RMR
부민옥 육개장, 진진 칠리새우, 레호이 분짜, 금미옥 떡볶이, 목란 짬뽕, 홍신애 김치 깍두기… 내 집에서 즐기는 외식
유명 맛집서 먹던맛 그대로 맛·품질 높인 ‘반조리 식품’
1980년대 중반 美서 탄생 코로나 시대 식문화 대세로
떡볶이·커리·전골은 기본 호텔 코스요리까지 집으로
“띵동띵동” 배달이 왔다. 막 도착한 음식은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시내 유명 레스토랑의 것. 원래는 그곳까지 가야 하고, 가서도 기나긴 줄을 서야 한다. 저녁이라면 둘만 갈 수 있고, 그나마 오후 10시까지다. 반면 봉지와 팩을 뜯어 간단히 데우기만 하면 성찬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럴듯하게 완성된 요리에다 좋은 술 한 병도 곁들일 수 있다. 술 또한 가정용이라 식당에서보다 저렴하다. 실제 외식으론 특정 식당 한 집만 갈 수 있지만, 주문의 경우는 다르다. 서울 여의도 ‘쿠마’에서 생선회 모둠을 주문하고, 조선호텔의 LA 양념갈비를 곁들여서 서울 상수동 ‘맛이차이나’의 짜장면을 끓여 먹을 예정이다. 다양한 맛집의 음식으로 코스 구성이 가능해졌다. 금세 모든 준비가 끝났다. 자, 이제부터 수저를 들자, 이것이 집에서 하는 ‘외식’이다.
감염병 비상사태라 사람끼리 거리를 둘지라도 ‘맛과 거리두기’는 아쉽다. 시내 맛집까지 외출이 버겁더라도 가정 간편식(HMR)으로 집에서 충분히 식도락을 즐길 수 있게 됐다. HMR란 ‘집밥 대체식품’(Home Meal Replacement)의 약자다. 이미 만들어진 요리를 가져와 집에서 살짝 조리하거나 그대로 섭취할 수 있도록 한 음식 제품군을 이른다.
분명 외식이 아니면서도 처음부터 가정에서 직접 조리하는 것도 아니다. 반제품 또는 완제품으로 생산되고 또 그대로 소비된다. 가정에서 맛있는 음식을 조리, 포장해 밖에서 먹도록 한 도시락과는 반대 개념이다. 집에 가져다 놓고 데워먹는 통조림이나 냉동 피자 같은 ‘즉석식품’과도 결이 다르다. 편의성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맛과 질에 중점을 뒀다. 그야말로 가정식과 외식의 중간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외식업이 거대한 변혁의 물결 앞에 서 있다. 바야흐로 HMR 전성시대다. 세상이 미처 예상치 못한 감염병 파동을 겪으며 HMR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내 HMR 산업은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도 이미 급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사회가 빠른 도시화에다 불경기, 소비침체 그리고 기존 맞벌이 핵가족과 1인 가구 싱글족이 늘어난 라이프 스타일, 여기다 노령화까지 급속 진행 중인 까닭이다. 신선 제품을 구입해 조리한다면 좋겠지만 시간적, 비용적 여유가 없다. 특히 요즘은 어디 여럿이 어울려 맛집을 찾아 시간을 보내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하지만 혼자라도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싶은 욕구는 늘 존재했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현실화시킨 것이 바로 HMR이다.
지난 10년 새 국내 HMR 시장 규모는 괄목상대할 정도로 커졌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보고서(2019년 작성)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국내 HMR 시장 규모는 3조2164억 원으로 전년보다 17.3%나 늘었다. 매년 급속 증가세를 보이며 2022년에는 시장 규모가 5조 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요식업 중 이만한 성장세를 보이는 분야는 없다. 따라서 신세계, 롯데, 현대백화점 등 대형 유통업체는 물론, CJ, 대상, 농심, 오뚜기, 동원, 하림 등 식품제조사들이 주력하고 있는 분야가 HMR이다. 마켓컬리는 식품에 특화된 머천다이징(MD)에다 스마트 정보기술(IT)과 빠른 배달망까지 얹어 대기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한국형 HMR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떡볶이, 쌀국수, 멘바오샤, 마라탕, T본 스테이크, 인도식 채소 커리 등. 가격대와 품질, 메뉴도 다양하다. 거의 모든 가정 요리 및 외식 요리들이 HMR 형태로 변신해 가정 등 실내에서 소비되고 있다. 간단하게는 국·탕류부터 밑반찬, 밥에 뿌려 먹는 가루양념(후리카케), 비벼 먹는 소스부터 집에서 먹도록 한 도시락, 분식 및 소 요리, 거창하게는 집에서 해 먹기 힘든 전골 종류. 이젠 호텔 레스토랑에서나 만날 수 있던 코스 요리까지 등장했다.
시장 가능성을 엿본 HMR 업체들은 유명한 맛집, 노포, 지방 인기 음식점과 협업한 제품을 연이어 출시했고 쏠쏠히 히트 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타 셰프를 영입해 이름이나 상호를 내건 제품도 쏟아내고 있다. 일식 정호영(카덴), 중식 이연복(목란), 양식 레이먼 킴, 한식 홍신애(솔트2호점) 등 스타 셰프나 요리연구가들이 기획한 음식을 직접 그들의 레스토랑에 찾아가지 않고도 맛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이러한 것을 따로 RMR라 분류한다. RMR는 레스토랑 대체식품(Restaurant Meal Replacement) 즉, 레스토랑의 요리를 집에서 즐길 수 있게 했다는 뜻이다.
이와는 구성이 좀 다른 ‘밀키트(Meal Kit)’도 있다. 완전조리나 반조리가 아니라 요리를 간편하게 해 먹을 수 있도록 손질한 재료와 맞춤형 양념을 팩으로 구성해 제공하는 형태를 말한다. 그대로 섭취하는 게 아니라 실제 요리를 해야 한다. 가정에서 자르기 어려운 식재료는 잘라 놓고, 손이 많이 가는 양념과 국물도 따로 제공한다. ‘홍신애 김치 키트’처럼 30분 만에 직접 김치와 깍두기를 담글 수 있는 키트도 인기를 끌고 있다.
HMR는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냉동 피자와 도넛 등 이른바 ‘TV 디너’ 일색이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좀 더 맛있고 신선한 음식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로 탄생했다. 밀집도가 낮아 가정과 식당과의 거리가 멀고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미국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맞아떨어졌다. 그때 막 보급되기 시작한 전자레인지를 활용한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HMR는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도시락(벤토) 문화가 ‘역주행’해 진작부터 HMR 산업으로 발달시킨 나라가 일본이다. 거의 모든 주택가와 상업가에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편의점과 슈퍼 체인 등 소매점을 통해 유통되는 다양한 식품과 반찬, 소스가 식탁을 점령한 지 이미 오래다.
일본에선 HMR을 나카쇼쿠(なかしょく)라 부르고 중식(中食)으로 쓴다. 점심이나 중국음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밖에서 먹는 외식(外食)과 집에서 먹는 내식(內食)의 중간 개념이란 뜻으로 '(中食)'이라 한다. 즉 집에서 먹는 외식문화로 인정했다.
이쯤되니 일본 내 대부분의 유명 레스토랑이 각각 업소만의 HMR을 내놓고 있다. HMR은 일본인 생활의 일부가 됐다.
중국집과 치킨, 족발집 등 전통적 배달시스템을 갖추고 있던 한국은 바로 HMR의 대유행을 받아들였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IT 기술과 모바일, 인터넷 인프라 또한 시장의 확산을 도왔다. 클릭 몇 번이면 최소한의 시간만 기다리고도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2020년,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린 코로나19는 대한민국 HMR 산업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과 다중 이용공간에 대한 공포증(phobia)은 집에서 음식을 즐기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평소 반조리 식품 섭취를 꺼리던 이들이 코로나19로 처음 HMR 제품을 이용해 보고, “어? 먹을 만하네” 하는 긍정적 반응을 상당수 나타냈고 이는 시장 확대의 밑거름이 됐다. 이른바 ‘코로나 특수’를 단단히 누린 셈이다. 요즘은 1만~2만 원을 웃도는 가격대의 고급 제품군이 쏟아지며 시장의 질적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경제성 때문에 HMR를 이용하는 게 아니란 얘기. 제품의 질적 고급화로 시장이 확장하고 있다. 실제 식당에서 1만 원에 팔고 있는 메뉴를 HMR 제품으로는 같은 값이나 오히려 더 비싼 가격(공깃밥이나 반찬도 주지 않는데?)을 매기기도 하는 건, HMR를 제대로 개발하고 유통하는 데 부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HMR 시장 확대에 따라 환자, 고령자, 유년층, 채식주의자 등 특수한 입맛에 맞춘 제품도 쏟아지고 있다. 집에서 따로 소량으로 조리하기 힘든 이런 특별식은 HMR 제품이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편의성과 경제성에만 맞춰져 있던 HMR는 이제는 맛과 품질로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싶은 욜로(YOLO·자신을 위한 소비 경향)족의 까다로운 입맛을 공략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얼마나 지속될 지는 미지수지만, HMR 시장은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품의 다양성과 맛이 개선되고 있고 이에 대한 소비자의 경험도 축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출을 멈추니 식당이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진진 칠리새우=그 이름도 유명한 서울 서교동 ‘진진(津津)’인데 줄을 서지 않고도 달콤한 칠리새우를 맛볼 수 있다. 어른 엄지손가락 마디만큼 두툼한 새우를 튀긴 다음 냉동했다. 특제 소스는 레토르트 파우치에 담았다. 바삭하게 익혀 소스에 버무리면 끝이다. 익숙한 향과 맛, 그리고 모양새다. 왕육성, 황진선 진진의 두 셰프가 직접 가져다준 듯하다. 에어프라이어가 좋지만 프라이팬이나 전자레인지를 이용해도 된다. 달콤하고도 매콤한 맛이 식욕을 당긴다. 가볍지 않은 소스 맛.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새우가 9마리 들었다. 안주로도, 반찬으로도 모두 좋다. 400g 9980원. 이마트 피코크 고수의 맛집.
◇금미옥 쌀떡볶이=서울 성수동 유명 분식점 ‘금미옥’이 내놓은 상품으로 국물 떡볶이와 함께 인기 쌍두마차를 끌고 있는 떡볶이 밀키트다. 냉동 떡과 어묵, 양념으로 구성됐으며 표시된 조리법에 따라 팬에 볶으면 라면 끓이기보다 쉽다. 존득한 쌀떡의 저작감이 매우 잘 표현됐다.
쌀떡 마니아를 위해 졸깃하게 뽑은 대신 한입 크기로 썰어 양념과의 균형을 맞췄다. 달콤한 양념은 뒷맛이 매운 편이다. 어묵은 깜짝 놀랄 만큼 진한 풍미를 낸다. 인기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게 쌀떡볶이라지만 비슷한 양의 국물떡볶이도 팔고 있으니 뭐 각자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440g. 5100원. 마켓컬리.
◇부민옥 육개장=한국의 가정간편식에선 국탕류, 그중에서도 육개장 종류가 제일 많다. 그만큼 만족도가 높은 메뉴다. 65년 전통 한식당 부민옥의 시그니처 메뉴는 육개장이다. 거의 소고기와 대파만 썰어 넣은 특유의 스타일이 있는데 이를 제대로 살렸다. 실제 메뉴와 거의 똑같은 맛을 지키기 위해 조리 후 급랭 제조법을 썼다. 시원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국물맛도, 소고기와 대파 등 식재료도, 푸짐한 양까지 흡사하다. 1팩을 뜯어 2명이 먹어도 괜찮다. 다동 무교동 먹자골목에서 처음 나온 간편식이다. 750g. 6팩 6만3900원(풍국면 건칼국수 3팩 제공). 지에스샵 다동무교동 노포골목 시리즈.
◇레호이 분짜=서울 경리단길(소월로) 쌀국수 맛집 레호이의 분짜 밀키트다. 쌀국수 건면과 불고기 정육, 특제 소스, 양배추와 양파, 오이, 견과류 토핑, 양파튀김 토핑 등이 들었다. 채소를 다듬고 쌀국수를 삶는 것으로 시작해 양념육을 볶고 육수를 붓고 토핑으로 마무리하는 조리 과정이 재미있다. 초보라도 굉장히 그럴싸한 베트남식 ‘분짜’가 완성된다. 신선한 채소와 이국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소스, 부드러운 고기 등이 레스토랑을 직접 찾아 요리를 받아든 느낌이 난다.
2인분 1팩 811g. 1만4800원. 이마트 피코크 고수의 맛집.
◇목란 짬뽕=인스턴트 라면처럼 집에서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짬뽕이 이연복 셰프의 목란에서 나왔다. 특유의 불맛(사실은 불향)이 잔뜩 배어 있는 매콤한 국물의 짬뽕이다. 조리 후 급랭 방식으로 제조해 그대로 뜯어 데운 후 면과 국물을 담으면 되니 편하다. 오징어와 돼지 육사(肉絲), 홍합, 양파 등 건더기는 냉동고를 다녀왔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탱글탱글 살아 있다. 다소 걸쭉한 국물은 분명 연희동에서 먹던 그것이다. 소다를 쓰지 않았지만 갓 해동된 면발에 쫄깃함이 살아 있다. 1.4㎏(면+국물·2인분). 1만3200원. 마켓컬리.
◇홍신애 깍두기=요리연구가 홍신애가 운영하는 ‘솔트 2호점’(원래 1호점이 없다)은 이탈리안 퀴진을 중심으로 다양한 메뉴를 아우르는 집. 밀키트는 한식 중심으로 낸다. 쓱쓱 조합하면 누구나 간편하게 김치를 담을 수 있는 김치 밀키트와 여름특집 열무김치에 이어 이번엔 깍두기를 내놓았다. 서울식으로 국물 흥건한 설렁탕집 깍두기다. 아삭하게 씹히는 깍두기가 그리 짜지 않은 국물에 잠겨 있다. 자극적이지 않아 달달하고 구수한 본연의 무 맛을 간직한 깍두기는 맨 밥에나 국수에나 어디에도 어울린다. 양념국물 ‘깍국’을 부어 밥을 볶거나 곰탕 등에 간을 맞춰도 좋다. 익히는 후숙 조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3kg. 2만7000원. 홍신애닷컴.
<놀고먹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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