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회피하면 의지는 박약해진답니다. -Aristotle
비 오는 날 시나몬 향 그득한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옆에서 두 사람이 말한다.
여자1 (아마 A양 모의 친구)
: A양이 매일 지각하는데, 아침에 무슨 일이 있나요?
여자2 (아마 A양 모)
: 일찍 일어나긴 하는데 일어나서 화장을 몇 번이나 고치고, 머리를 다시 감거나 해서요. 늦으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고3이라 스트레스받을까 봐 이제는 별 말도 못 해요.
위와 같은 대화(?)를 듣다 보니 불현듯 포스트 트루스(탈진실) 의 정의가 떠오른다.
<탈진실 :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이제 A양의 의지박약과 탈진실 시대 간의 표상이 하나의 현상이 되고 개념이 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Akrasia : 의지박약] 해결책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내 한숨과 탄식이 나온다. 어렵겠어.
아리스토 선생님에 의하면, 의지박약을 극복하기 의해 먼저 진짜 바른 게 무엇인지 참으로(실천적으로) 알아야 한다. 즉 Phronesis(실천적 지혜)를 통해
“지각은 덕 있는 삶을 이루는 데 매우 좋지 아니하다”
임을 자각해야 한다.(소크라테스는 이 자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함)
하지만 A양의 모친은 딸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론 가능하다.
첫째, 좋은 삶에 필요한 진실보다 감정의 일시적 안녕이 더 중요하니까.
[둘째, 모친인 본인도 지각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을 안 할 수도 있다.
(둘째인 경우는 제외하자. 만약 그런 거라면 이 논의는 상당히 복잡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거대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야 하므로. 잠깐 질문을 던진다. 지각하는 것은 나쁜가!?)]
무튼 둘째 논의는 제쳐두고.
이런 지 오래된 것 같다.
그 대단한 감정을 상하게 하면 안 되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미덕(시간을 준수해야 한다)을 말하지 않는, 말하지 못하는 사회.
진실보다는 기분을 맞춰주는 눈치가 최상의 미덕인 사회.
정의보다는 인기로 표를 얻는 게임의 감각이 정치인의 자질이라고 우쭐대는 사회.
대학 전 최고학년인 고3에게 심화 탐구를 요구하고, 심화탐구라며 위상수학을 논하고, 사회계약에서 주권은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하는지 토론하자면서.
주희의 선지후행과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교하는 인문학 과제를 제시하면서.
정작
“머리 그만 만지고. 제시간에 도착, 즉 지각하지 말거라”라는 말을 못 하는 사회.
음. 이거야말로 탈진실 사회를 여실히 보여주는구먼.
진실을 말하고, 진실이 감정을 추동하는 사람.
진실이 불편해도, 진실을 귀히 여기고, 진실에 따를 때 진짜 기쁨을 누리는 품성상태(hexis)를 갖추기 위해 지속적으로 prohairesis(합리적 선택)을 하는 덕인이 많아지면 이 사회가 좀 더 멋있어 지지 않을까.
“지각하지 말거라”
“쓴소리니 처음엔 기분 나빴지만 그건 내가 허접해서 그렇고
이제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좋은 내가 되었으면 하는 팩트로서의 워딩인 것도 알고요.
오히려 그런 진실을 다시금 되새겨주셔서 저도 의지를 다질 수 있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화장 그만하고 출발하겠습니다.“
이런 대화일 순 없을까.(고등학생 말투가 아니라 죄송)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천재다. 하지만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주 좋아하는 큰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진실보다 기분이 중요하십니까
팩트보다 감정이 중요하십니까
그건 당신(의 품성상태)이 참 허접해서 그런
것이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