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e과 그녀
며칠 전.
일본의 아저씨? 아니 노년? 아니 그 사이에 있는. 젊은이들도 다 아는 국민가수인 사잔올스타스의 음악을 들으며 퇴근하던 길.
왠지 흥이 났다(누구나 차 안에서는 왠지 모르게 엄청 공격적이거나 엄청 센치해질 때가 있지 않나요...?).
"나미다가 아훞레루 카나시이 키세츠와~" 사잔의 '한여름의 과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그 감정이 아후레루(=넘쳐 흐르다)했나.
철 지난 J-POP곡들이 뇌리에 스친다. 딱 지금 기분, 분위기에 들어맞을, 내가 2030이었을 때, 나의 심금을 울린 노래.
주저 없이 유투브 뮤직에서 검색한 곡은 Exile의 '타다 아이타쿠테(그저 보고 싶어서)'.
(참고로 Exile은 에그자일이라고 발음하는데, 난 꽤 오랫동안 이그자일로 알았고 그렇게 불러왔다. 사르트르가 좋아하는 Exist는 이그지스트라고 발음하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했지. 뒤에서 "쟤 완전 영알못이야" 이랬겠지..? 퍼킹 잉글리시...)
1회 차, 2회 차, 3회 차. 5번쯤 들으니 20대 후반에 만난 그녀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벌써 약 10년 전.
당시 나는 아무나 만나고 다녔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상대에게 죄송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상대방이 별로라서 아무나라는 게 아니라 별 고민 없이 만났다는 의미. 감정이 활연해지지 않아도, 그저 만났다.
대학 때 워낙 치열하고 진득하게 연애를 한 후 스페셜리스트보단 제너럴리스트가 돼 보자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상대분이 나를 적당히 괜찮아하시면 일단 만났다(물론 거절의 메시지가 더 많았다는 건 안 비밀).
그런 생각으로 만나보니 그런 만남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뽀뽀도 없고, 새록새록함도 없었다.
희로애구애오욕이 없고, 그렇다고 플라토닉 하지도 않고. 그냥 같이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친구처럼 이야기하고, 의무감에 전화를 했다.
그러니 한두 번 만나면 늘상 이런 식의 연락이 왔다.
"우린 잘 안 맞는 거 같아"
마지막 상대분에게는 내가 통보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초가을인 어느 날. '굿 데이 투 다이(다이하드 영화)'가 끝나고 나는 횡단보도에서 갑자기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당시의 그녀(참 괜찮은 분이었는데)를 반강제로 태운 후 "굿 데이 투 바이" 하면서. 그렇게 이별을 통보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정말 죄송하다. 하지만 그분도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별 대답이 안 온 걸 보면. 그러니 욕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20대였습니다.
이후 진짜 연인을 만나기 전에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 달쯤 흘렀나. 날이 선선해진다. 고백 성공률이 높아지는 계절.
퇴근 중 대학로를 지나던 차 H은행을 다니던 친구 놈에게 전화가 왔다.
"준아. 어디냐. 아아. 근처네. A에서 맥주 마시는 중인데. 와라. 꼭 와.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녀는 예뻤다. 친구 놈의 은행 동기인 W양은 카라의 구하라와 판박이었고 구하라보다 5% 정도 크고, 20% 정도 더 잘 웃었다. 참고로 난 구하라 팬이었다.
센스 있는 친구 놈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대, 둘이 번호라도 교환해"
그렇게 우리는 여차저차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엑스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진입장벽이 좀 낮아진 탓이리라. 어쨌든.
확실히 이번엔 달랐다. 감정의 격이 달랐고, 만나자는 말의 차원이 달랐고, 문자의 고민이 달랐으며 데이트의 양상이 달랐다.
세 번쯤 만나고 아바타라는 영화(러닝타임 겁나 김)를 두 번째 볼 때(그녀 때문에 또 봄) 조심스레 잡은 손은 찌릿찌릿, 그러니까 물리적으로도 달랐다.
KBL농구를 직관할 때 5m 앞의 치어리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말투, 이해심 많은 성격, 네이티브급 일본어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 여운을 남기는 눈웃음을 지닌, 하지만 여우가 아닌 (이쁘다고 다 여우가 아니라는 걸 이때 알았다) 나의 걸프렌드였다.
하지만 이 스토리의 결말은 허무하다.
우리는 100일이 채 못되어 헤어졌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난 모든 이유를 Exile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다.
<상황>
그녀 :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Exile이라는 일본 밴드인데(참고로 그녀는 일본에서 유학을 오래하여, 일본어를 네이티브로 구사함) 발라드 베스트 앨범을 내서. 일본 친구한테 부탁해서 힘들게 구해왔어.(매우 기뻐함)
그 : 오호 좋다. 아주 좋아. 들어보자. (잠시 후) 아아. 정말 좋은데??
<상황 2>
그 : Exile 노래 들을까?
그녀 : 응 좋아(매우 기뻐한다)
그 : (자동차 에어컨 옆에 USB를 꼽는다)
그녀 : 응??
그 : 아아. W가 선물해 준 CD가 없어졌지 뭐야. 한국에선 CD 팔지도 않고. 마침 소리바다(당시의 공유폴더)에 (불법이었을 듯) 이거 압축파일이 올라와 있더라고.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가부지?? 대단해 정말. 그래서 USB에 다 담아 왔지~. CD 뺐다 킬 필요도 없고 더 간편해. 음질도 더 좋은 느낌이야(혼자 신남).
그녀 : 아아. 그렇지. 헤헤 (그녀는 정말 착했다.)
- 상황 종료 -
위와 같은 상황이 일회적일 리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당시 20대의 멍청한 그는 매번 저런 식으로 헛발질을 했을 거라는 걸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행위는 품성상태에서 나오고 한 분야에서만 철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옆발차기하는 그라면. 얼마나 많이 그녀의 인내심을 테스트했을까.
이렇게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기존에 아무나 와 만나던 때처럼 그녀를 대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차인 후 (차인 장면은 너무 슬퍼서 말할 수 없는 비밀) 나는 상당히 발전했다. 적어도 '이런 건 상대에게 최악이다'라는 것들을.
그리고 아마도 이 이후부터 나는 ENTJ에서 INTJ가 되었으리라. (그놈의 T수치도 많이 줄었다. 99에서 60 정도로?. 아마도?)
사실 저 MBTI 안 좋아해요. 그래도 W양 덕분에 상당히 많이 발전했답니다. 그 이후로 "태준 씨는 초식남 같아요." 이런 소리도 듣고요.
무튼. 며칠 전. 나는
사잔올스타스의 노래를 듣다가,
그 노래를 신혜성이 부른 걸 듣다가
일본 노래 중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Exile(에그자일입니다. 이그자일 아님)의 '타다, 아이타쿠테'를 듣다가
옆발차기만 하던 멍청씨를 꽤 많이 성장시켜 준
W양이 생각났다.
P.S.
1. 그 CD는 운전석 밑에 떨어져 있었다.
2. 대학 때, 3년을 만난 S는. 헛발질 전문 TJ와 아무 불협이 없었다.정말 누가 참은 것도 아니고. 진짜 둘이 잘 맞았다.
그런 사람도 있다. 다시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