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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천사들의 엄격함(에세이+서평)

내가 알기론 나도 너도 천사가 아닌데…

by 김태준


졸업한 제자 A를 만났다. 학창 시절 내내 총명하고 프래그머틱했던 친구였다. ‘인생사를 잘 헤쳐 나가리라 확신함’ 등의 추천서를 써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A는 17세부터 20년 후의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하곤 했다. 논리학자 뺨치는 로직 트리를 그리며 ‘요 대학에 가면 외무고시를 보고, 외무고시가 떨어지면 회계사 시험을 보고, 요 때 얼마를 모아서 뭘 사놓고, 요걸 못 모으면 요렇게 해서 조렇게 하고’, 라는 계획 등을 잘도 묘사하던 친구였다(이젠 다 친구다. 제자고 뭐고 다 같이 늙어가니.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관이 나름 정립된 나이라면 비대칭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요는 나이가 크게 중요치 않은 사회가 좋다.).


A는 실력보다 아쉬운 대학(그래도 충분히 좋은 대학)의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두 번 만에 CPA에 합격, 회계사가 되었다. 그 턱으로 나에게 저녁을 사기로 한 날의 대화.




이러쿵저러쿵 시시껍절(?)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 사귀던 아이는 어떻게 되었고 어머니는 짜장면을. 아니 어머니는 잘 지내시고 등의. 당시 나는 박사 공부가 한창 재밌던 터라 내 연구주제(보편적 가치-존재론-실재론)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실용주의의 대표자인 A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그런 (실재론) 철학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그때 철학 수업 좀 더 들을 걸 그랬어요.”

(당황함. 당시엔 가브리엘이나 하먼이나 메이아수를 몰랐다)

“이제 진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시대니까요.”

(침묵함.)


실용주의이자 현실주의자였던 A가 그런 당위에 대해 갈급해하다니. ‘그럴 수도 있지’가 판치는 시대의 부유하는 가치들 속에서 사는 게 그리 만족스럽진 않은가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목표했던 것들을 하나씩 이루어보니 (마치 박진영처럼) 뭔가 더 고상한 것에 대한 욕망이 생겼을 수도 있고. 유럽 여행을 다니며 사귄 친구들의 대책 없는 분방함과 다양성(대표적으로 성 선택 주의) 때문인지. 무튼 A는 갈급했다. 뭘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다수, 인기, 자본으로 좌우되지 않는 그런 디딤돌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때 변변찮은 대답만 해댔다(늘 뒤늦게야 그나마 나은 생각이 든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A가 이른 나이에 삶의 허무감을 느끼는 것 같아(잘못 짚었다)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을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형이상학적 자살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도 정작 즐겁게, 오래 살았다든지, 등의 답변. 하지만 나도 동의하지 못하는 결론들이니. 결국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를 선물로 주면서 A에게,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멋있는 실용주의자(상대주의자)도 있어. 보편에 실패해도 너무 낙담하지 말자……”

“(이번엔 A가 침묵함)”





이제 와서지만. 나는 이런 답변을 해야 했다.

아니 이 책, <천사들의 엄격함-윌리엄 에긴턴>을 선물해줬어야 한다. 천사들의 엄격함은 보편주의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 아무리 봐도 민주주의가 나은 것 같지만,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사상가의 주장을 절대악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정신에 어긋(이율배반)나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여기를 보고 저기를 봐도 현실적이고 일반적인 그놈의 “다 다른 거야”라는 강력한 문구를 필두에 세운 상대주의. 하지만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자체를 회의하지 못하면 그건 회의주의의 이율배반일 터, 따라서 공정하게 회의주의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보편의 논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나는 그걸 말했어야 한다. 너무 쉽게 회의주의를 절대적 사상으로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


보편의 질문 자체를 폐기하면, 회의주의는 회의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절대 교리(보편 원리)처럼 군림한다. 보편적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 그러한 논의를 절대악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사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고, 관점이 아니라 도그마이다.

보편을 논하든, 회의를 논하든, 간음죄와 낙태(혹은 임신중절)를 논하든, 미국 우선(?)주의를 논하든, 부의 대물림이 뭐가 문제냐를 논하든, 반일을 논하든, 친북을 논하든, 철저한 이기주의가 뭐가 나쁘냐를 논하든, 자본의 계층화가 기능론적으로 매우 합당하다고 논하든. 무엇을 논하든 간에 우리가 먼저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천사(관계 의존적이지 않은 절대적 인식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 명제가 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놀랍도록 풍부한 사례와 세련된 논증은 덤.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나아가 사회 현상, 윤리적 가치)는 “천사들”이 보는 방식(절대적·완전한 관점)의 엄격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한된 관점에 의해 규정된다.


(여기서 흔히 오해가 생긴다. “그럼 진리는 없다는 말인가?”라는. 아니다. 에긴턴이 지목하는 것은 ‘진리 부정’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접근 방식의 엄격한 절제’다. 즉, 존재론을 단순히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뭉스러운 승리를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인식의 조건을 무시할 때 생기는 오류를 끝까지 추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상대주의의 축제가 아니라, 인간 이성에 대한 차가운 경의(敬意)에 가깝다)


보르헤스는 문학으로,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으로, 칸트는 철학으로—객관적 실재와 경험되는 세계의 간극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다.


- 보르헤스는 “세계의 바깥”을 말하려는 언어가 결국 자기 꼬리를 무는 순간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만든다.


- 하이젠베르크는 측정과 관측이 ‘받아 적기’가 아니라 ‘개입’임을 드러내며, 고전적 확실성의 신화를 붕괴시킨다.


- 칸트는 “물자체(thing-in-itself)”와 “현상”의 분리를 통해, 인간 인식이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범주)을 밝힌다.


(난 하이젠베르크는 잘 모르니까. 이 책의 중심 사상가 칸트를 좀 더 말하자면.)


칸트는 이성이 세계 전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서로 모순되는 결론이 동일한 수준의 논증으로 귀결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 모순을 칸트는 이율배반(antinomies)이라 불렀다.


이율배반은 단순한 “철학 퍼즐”이 아니라, 이성이 자기 확신을 과도하게 확장할 때 생기는 구조적 붕괴다.

그러니 해결은 ‘더 큰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정확한 한계 설정’에서 시작한다는 것.



결국 정확한 한계 설정은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천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우리의 인식, 나아가 모든 것은 “관계로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리바이브가 아닐까, 라고 성급히 결론 낼 수도 있다. 로티가 됐든.

하지만 니체가 여기서 멀티유니버스처럼 자기의 실재(힘)를 창조하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서 수많은 연구자를 슬프게(혹은 재밌게) 했다면, 저자는 관계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숙고한 상태로 물리학이나 철학, 존재나 인식을 논하라는 것이다.


저자 에긴턴은 이 균형감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책의 종반부. 에긴턴은 다음과 같이 <많은 사람이 속고 있는, 속기 쉬운> 두 양극의 결론을 모두 거부한다.


1) “관계만 있다면, 객관적 실재는 허구 아닌가?”

2) “관계가 있다면, 실재는 관계 속에서도 단단한 법칙으로 잡히는가?”


에긴턴은 이 둘 중 하나를 함부로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유혹 자체가 ‘천사들의 관점’을 흉내 내려는 이성의 과욕이라고 의심한다. 그리고 이 책의 미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생긴다. 인간이 세계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곧 세계가 빈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제한은 결핍이 아니라 형식이다. 이 형식 덕분에 우리는 세계를 “풍부하고 장엄하게” 경험한다는 식의 역전이 가능해진다.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방식은 ‘독단’이 아니다

누군가 보편 원리의 필요를 주장할 때, 늘 따라붙는 반론이 있다.


“그 보편은 결국 폭력의 정당화 도구일 뿐이야.”


양차 대전, 종교전쟁 등 근대가 남긴 상처를 떠올리면 그 반론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편의 질문 자체를 폐기하면, 이제는 허무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가 오히려 하나의 교리(보편 원리)처럼 군림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 문제의식을 느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제자 A의 불편감도 바로 이 근거 없이 전제적인 ‘회의주의, 상대주의’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이런 사회일수록 『천사들의 엄격함』의 가치가 빛난다.

많이 배울수록 뇌가 말랑해진다는 뭐 뭐 씨의 말처럼. 우리는 나의 엄격성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이 책의 요지가 “보편을 포기하라”라는 단연코 아니다.

1. 보편을 말하되, 천사처럼 말하려 하지 말 것.

(어조, 논조는 참 중요하더군요!)


2. 실재를 탐구하되, ‘실재를 그대로 소유했다’라는 태도를 금지할 것. (이 부분은 신실재론자 삼인방 모두 잘 지키니, 연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브리엘, 메이야구, 하먼)


3. 이성은 강력하지만, 그 강력함은 자기 한계를 아는 엄격함이라는 것(역시 칸트 선생님. 하지만! 언제나 엄밀하자. 칸트 형님은 인종차별자였으니)


그래서 이 책은, 상대주의에 지친 사람에게는 “다시 생각할 용기”를 주고, 실재론에 매혹된 사람에게는 “독단을 피하는 장치”를 제공한다. 이 두 뿔은 요리조리 피해 가야 하는 게 철학의 숙명이겠다.


보편은 다시 요청되지만, 그 요청은 겸손하고 기술적이며. 하지만 최대한 엄밀해야 한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그 사유가 맞으므로!>


- 포스트모더니즘을 “유행”이 아니라 “철학적 과제”로 느끼는 사람

- 칸트가 답이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 ‘과학 vs 인문’의 싸움에 질린 사람(이 책은 그 싸움을 애초에 무의미하게 만든다)


끝으로.

이 책을 한줄로 정리한다면?


물질이든 정신이든 가치이든 세계이든 개인이든 상징이든 기호이든


말하려면, 먼저 말할 자격의 조건부터 점검합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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