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창유리를 탁탁 내리쳤다. 나는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모두 망가진 얼굴들, 피로 얼룩진 옷자락들. 형사의 일상이었다. 커피포트에서 나는 증기는 이미 식어버린 공기를 살짝 데울 뿐이었다.
그러자 또 다시 찾아왔다.
처음엔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발밑이 땅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간절함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다음엔 always 보라색 드레스가 스치고, 달콤쌉싸름한 향기가 코를 스쳤다. 마지막은 always 눈앞이 온통 붉게 물들다가, 날카로운 금속성 냄새와 함께 정적이 내려앉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다. 이 꿈은 벌써 일주일째다. 똑같은 패턴, 똑같은 여운. 하지만 형사로서, 꿈 따위에 휘둘림 시간이 없었다.
사건은 발생했다. 한 여성이 후두부를 강타당한 채 자신의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사건 현장은 조용하고 깔끔한 주택가였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공기 중에 맴도는 그 달콤쌉싸름한 향기, 내가 꿈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거실 소파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피해자. 그녀의 몸은 보라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꿈속에서 스치던 그 보라색이었다.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강도 흔적은 없었다. 완벽한 밀실이었다.
수사는 난항이었다. 용의자가 너무 많았다.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 빚을 독촉당하던 그녀의 동생, 사업 파트너까지. 모두가 알리바이가 있었고,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거짓말 속에서도 꿈속의 여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며칠 후,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또 다른 여성, 같은 방법, 같은 현장의 분위기. 하지만 이번에는 살아있었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꿈… 꿈을 꿨어요. 안개 속에서 누가 절 부르는데…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갑자기…"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로 뛰어갔다. 두 피해자의 공통점을 파헤쳤다. 알고 보니 그들은 같은 심리 상담 클럽 회원이었다. 같은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고 있었다.
상담사 김민석. 그는 유미래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었다. 그를 조사하면서 내 꿈은 더욱 선명해졌다. 안개 속 여자 목소리는 점점 또렷해졌고, 그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임을 직감했다.
그를 소환했다. 매끄럽고, 논리 정연한 그의 말솜씨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뭔가가 비껴나갔다. 내가 꿈에서 본 그 절박함, 그 공포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무언가가.
그날 밤, 꿈은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안개가 걷히고, 여자 목소리는 이제는 명확히 들렸다.
"제발… 제발 막아줘…"
그리고 내 눈앞에, 김민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차에 올랐다. 김민석의 상담소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안에서는 누군가의 숨 가쁜 대화가 들려왔다. 내심으로는 이게 현실인지, 또 다른 꿈인지 분간이 안 갔다.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김민석은 한 여성을 바닥에 묶어놓고 있었다. 옆에는 테이프와 주사기가 놓여 있었다.
"멈춰!" 내 외침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형사님, 꿈꾸는 중이세요?"
그 순간, 모든 것이 섞여들었다. 꿈과 현실, 예지와 망상. 하지만 손에 쥔 권총의 무게만은 분명했다. 그가 주사를 들고 다가서는 순간, 내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탕!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멈췄다.
다음 날, 사무실 책상에 앉아 보도 자료를 읽었다. '천재 형사, 연쇄 살인 미수 사건 해결'. 모두가 나를 칭찬했지만, 아무도 내가 꿈을 꾼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개도, 목소리도, 보라색 드레스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어둠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꿈이 사라진 안도감도 잠시, 문득 궁금해졌다. 그 고요함은 진정한 평화인가, 아니면 다음 폭풍을 위한 눈속임인가.
나는 커피포트 스위치를 켜고, 또 다른 사진 더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현실은 계속되고, 형사의 일상은 반복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가장 위험한 악몽은,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끝없는 꿈이 되어버리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