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지와 사우나
새벽 다섯 시, 누가 깨우지 않아도 눈이 떠졌다. 산장 마당에 나가보니 물안개가 피어올라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일출 전 암봉 먼저 깃든 햇살이 황금색 빛의 향연을 펼쳤다. 이렇게 트레킹 둘째 날이 시작됐다.
출발 대기 중 외국 트레커들이 옆에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Where are you from?”
“I’m from south korea.”
‘한국’이라는 대답에 외국인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열심히 얘기했지만, 긴 영어는 내 귓가를 그냥 흘러갈 뿐이었다.
나도 예의상 물어봤다.
“Where are you from?”
“From Salzburg.”
잘츠부르크! 내가 가본 동네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소시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때부터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모차르트 얘기를, 그것도 영어로 계속 들어야만 했다. 대학시절, 배고픈 배낭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소시지의 도시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의 도시’로 세뇌되는 순간이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하루 종일 태양이 강렬했다. 소시지처럼 벌겋게 익어가면서 길을 걷고 또 걷다 시원한 냇가에 이르렀다. 거대한 파네스 협곡에서 흘러내려온 투명한 물에 양말을 벗고 들어갔다.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사진을 찍느라 얼굴은 웃고 있지만 발에 전기 고문 같은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방송에서 보던 얼음물 벌칙이 진짜 ‘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학습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뻔했으나, 목가적인 분위기의 라바렐라 산장에 도착해서 이번 여행의 최고의 선물을 만날 수 있었다.
산장 옆에는 나무로 만든 거대한 술통에 지붕을 얹은 모습의 사우나통과 유아용 워터파크에나 있을법한 작은 물통이 매달려 있었다. 네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핀란드식 사우나통은 돌로미테 트레킹과 환상의 조합을 이루었다. 장거리 걷기로 지친 몸이지만 일행과 함께 워터파크에 놀러 온 아이들처럼 속옷만 입고 자연 속에 뛰어들었다. 산에서 흘러온 차가운 물을 끼얹고 난 뒤 통 안에서 뜨거운 사우나를 즐기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산장 투숙객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쯤 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에서 온 아저씨 네 명은 돌로미테 사우나에 푹 빠졌고, 앞으로 트레킹 코스에 있는 모든 사우나는 다 가기로 굳은 약속을 했다.
다음날.
이번 트레킹에서 체력적으로 제일 힘들다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제 사우나를 즐긴 덕분에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해발 2486미터인 ‘레흐고개’ 비탈길에 앉아 질긴 샌드위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가이드에게 물었다. “오늘 가는 산장에도 사우나가 있나요?”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해도 사우나만 있으면 우리 ‘사우나팀’에게는 거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거대한 토파네 산군을 보며 도착한 ‘라가주오이 산장’은 멋진 풍광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물론 산장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입구에 있는 사우나통이었다. ‘오늘은 멋진 경치를 보며 사우나를 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예약 시간에 맞춰 사우나장으로 향했다. 사우나 출입문 너머로 젊은 외국인 남자가 보여 멈칫했을 때, 그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가운을 벗고 뇌가 정지해 버렸다. 그 남자 맞은편에 상의를 탈의한 외국인 여자가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억겁 같은 찰나의 시간 동안 정지상태로 있다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유리문이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실례라는 생각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Hi!” 인사하며 들어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사우나를 즐겼다. 하루의 피로가 완벽하게 풀렸고 우리 ‘사우나팀’은 다시 한번 사우나는 무조건 가기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