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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z Oct 02. 2015

결심

4. 제자리

잠에 들었다가 중간에 잠시 깼다. 아직 밖은 어두웠고 눈앞은 희뿌연 연기만 가득했다. 너무 추웠다. 온몸이 차가워졌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왠지 머릿속에서 어렸을 적부터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기억들 중에서도 좋았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눈물이 났다. 다시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이 떠졌다.  눈 앞이 밝았다. 해가 뜬 모양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방안은 온통 연기로 차있었다. 하지만 난 멀쩡했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땅에 짚었다. 손이 짚어졌는데 손에 감각이 없었다. 손을 보니 손이 보라색이었다. 손을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움직이긴 하지만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힘은 들어가서 억지로 일어섰다. 다리에도 감각이 없었다. 얼굴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걸어갔다. 걸어갔다기보단 거의 기어서 갔다. 원룸이라 거리가 짧아서 다행이었다. 부엌에서 남아있던 번개탄을 꺼냈다. 하나를 더 넣으면 냄비보다 높아 혹시 불이 날까 넣지 못한 거였다. 다 타 버린 번개탄을 손으로 잡았다. 뜨거웠다. 냄비채로 쏟아붓고 새걸 넣었다. 


'성냥.......'


성냥을 찾았다. 하지만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불을 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넘어졌다. 다리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쿵하고 꽤 세게 넘어졌지만 많이 아프진 않았다. 다시 꾸벅꾸벅 잠이 왔다. 눈이 계속 감겼다. 추웠지만 이불 있는 곳까지 갈 힘이 없었다. 그대로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이 떠졌다. 햇빛은 더 세졌다. 나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몸은 더 추워졌다. 머리는 더 아파왔다. 속이 좋지 않았다. 구역질이 났다. 토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화장실 쪽으로 기어들어갔다. 거기서 다시 쓰러졌다. 또다시 눈이 감겼다.



또 다시 눈이 떠졌다. 화장실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불이 켜져 있었다. 머리는 더 지끈거렸다. 귓가에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환풍기!'


화장실 전등 스위치와 환풍기 스위치가 하나로 되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스위치가 눌러져 켜진 모양이었다. 방 안쪽을 보니 아까보다 방이 덜 뿌연 느낌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죽지 못했다. 아니 죽는 것도 못했다.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있는 힘껏 주먹을 바닥에 내리쳤다. 하지만 힘은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고, 감각은 여전히 없어서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 눈물만 쏟아졌다. 목소리를 낼 힘도 없었다. 어느 순간 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또다시 깨어났다. 아까 깨어났을 때 환풍기를 다시 껐지만 연기는 더 옅어진 느낌이었다. 그때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오늘 죽지  못하는구나......'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왠지 아까보단 덜한 느낌이었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지 못했다. 지금 그대로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자 왠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불러야 했다. 머리도 너무 아팠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 생각났다. 헤어진 전 남자친구...... 다시 눈물이 났다. 생각해서 부를 만한 사람이 전 남친밖에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뼈아프게 다가왔다. 내가 정말 혼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그 애는 내 연락에 바로 달려와줬다.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맥검사를 하고 산소마스크를  쓰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여전히 추웠고 자고 싶었다. 그 애는 내게 다시 사과하며 빌었다. 다시 시작할 수는 없겠냐고. 난 그냥 알았다고 했다.


산소 수치가 정상에 가깝게 되고 난 그냥 병원을 나섰다.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병원에선 입원 치료를 권했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돈도 없었다. 


멍하니 있었다. 그 애는 나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잘해주겠다고 말했지만 그 약속을 바로 그날 깨버렸다. 그 애의 말과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실망하진 않았다. 그냥 담담했다. 결국 며칠 뒤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아무도 내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오히려 밝게 행동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멀쩡히 웃으며 돌아다녔다. 어차피 내가 힘들다고 해도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바뀔 사람도 없었고, 상황도 바뀌지 않을게 분명했다. 오히려 나는 담담해졌다.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웠다. 힘든 일이 생겨도 


'그래, 난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이젠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지 제대로  아니까......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어.'


언제든 떠날 수 있을 때 떠날 수 있고, 그 방법도 알고 있다. 그게 제일 큰 버팀목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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