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면서 항상 내가 고민했던 것이 있다.
철학적인 궁금증이 아니었다. 사춘기여서 하게 된 생각도 아니었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이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나는 1990년에 태어난 여자이다. 그 이유만으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 왜냐하면 여자였기 때문이고, 하나는 1990년 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해는 백말띠라고 해서 그 해에 태어난 여자애들은 기가 매우 세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할머니는 나를 지우라고 했고, 엄마는 수술하길 거부하다가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아빠, 할머니, 엄마에게 어렵지 않게 들었다. 잊을만하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이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을 때면 언제나 '그때 그냥 없애지... 왜 낳은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왜 수술 안 했어?'라고 물어보니 '수술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수술하기 무서웠거든.'이라 말했다. 엄마는 정말로 단지 그뿐이었다고 친절하게 덧붙여 주기까지 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구박데기였다. 여자애에 90년생에...... 거기다가 하필 나는 추석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 고생시켰다며 생일쯤이 되면 혼이 났었다. (예정일이 10일이 지났는데도 할머니가 며느리 맞고 처음 맞는 명절이라며 차례 지내고 가라고 했다고 한다.)모든 게 날짜를 못 맞추고 추석날에 태어난 내 잘못이었다.
거기다 나는 왼손잡이였다. 어른들이 싫어하는 삼박자는 골고루 갖추고 태어났다. 덕분에 나는 항상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혼이 났었다.
조금만 떠들어도, 조금만 뛰어다녀도 '백말 띠니깐 여자애가 영 말괄량이네.', '역시 백말띠네.'라는 소리를 듣기 일수였고(이건 집에서만 듣던 건 아니고 학교에서도 자주 듣던 이야기이다.), 밥을 먹을 땐 항상 손등을 짝 소리 나도록 맞았다.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제대로 쥐기전까진 밥은 없다며 '그것도 못해?'라는 말을 수백만 번.. 수천번 들었다. 어쩌다 용기를 내서 '엄마도 왼손으로 하면 못 먹잖아요.'라고 말하면 '왼손은 틀린 거잖아!'라는 고함을 듣고 더 혼났다. 그리고 아빠에겐 엄마에게 말대꾸를 했다며 더더 혼났다. 그게 일상... 아니 당연한 거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동생'이라는 존재 덕분에 더 나에게 힘들게 느껴졌다. 내 동생은 모두가 바라던 대로, 모두가 원하던 대로 남자 아이였다. 거기다가 장손...... 그것만으로도 나와는 다른 지위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동생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 성별을 안 그 순간부터 나보다 높고 중요한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동생은 오른손잡이였다. (뭐, 동생이 왼손잡이였어도 별말은 안 했겠지만) 모든 관심은 동생에게로 향했고 나는 더욱 구박데기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동생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왜냐면 혼나는 게 어른들이 항상 말씀하는 대로 '내가 못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못해서' 혼이 나는 거였기 때문에 '안 혼나기 위해서' 나는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안 혼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의 기억은 대부분 부모님과 혼나고 맞았었던 기억밖에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기꺼이 따랐고, 하기 싫어도 불만을 이야기하거나 얼굴에 표시 내지 않았다. 다 내가 잘못해서, 노력을 안 해서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혼을 내도 혼자 눈물만 흘리다 더 노력하는 바보같이 미련한 아이였다. 하지만 내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해도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성적이 내리면 당연히 혼이 났고, 성적이 그대로면 왜 노력을 안했냐며 혼이 났다. 성적이 오르면 왜 이것밖에 안 올랐냐며 혼이 났다. 1등급을 받아도 만점이 아니라고 혼났고, 만점이라도 동점자 수가 이렇게 많은데 당연한 거 아니냐고 혼이 났고, 다른 건 왜 이것밖에 못하냐고 혼이 났다. 대회에서 상이라도 따오면 그걸로도 혼이 났다. 장려상을 타면 왜 이것밖에 못 탔냐고 혼이 났고, 최고상을 받아도 '이렇게 작은 대회에서 이 정도 타는 건 당연하지.'라고 혼이 났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전국적인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아본 적도, 전교 등수가 최상위권에 든 적이 없어서 그랬더라면 좀 달랐을까라는 의문은 가지고 있다.)
혼이 나면 속상해 울면서도 나는 더 노력했었다. 중학교 때부터 수능이 끝나기 전 까진 거의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고, 시험기간이 아니라도 매일 새벽까지 공부를 했었다. 몸이 약해 매일 병원을 가고 링거를 맞아도 학원이나 야자를 빠지는 법 없이 노력했지만 난 항상 혼났다. 그리고 그것밖에 못한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맞았다. 결과는 늘 부모님 성엔 차진 않았고, 그 유난을 떨며(내가 아픈 걸 유난이라고 하셨다.) 공부해도 그것밖에 안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한 건 바보처럼 혼자 우는 것 밖에 없었다.
'난 이렇게 해도 이것밖에 못해.', '난 왜 좀 더 잘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항상 머리 속에 기본 프로그램처럼 박혀있었다. 그러다 간혹 부모님 기대에 맞추기 너무 힘들어서 남에게 힘들다는 푸념을 했다가 그게 돌고 돌아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가면 난 또 혼이 나야했다. 부모님을 나쁘게 말했다는 이유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 쓸모없는 아이, 그것밖에 못하는 아이... 부모님이 말하는 나였다. 나는 그렇게 견뎌내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