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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함 Sep 09. 2021

따라할 수 없는 동네, 개항로

[INTERVIEW]개항로프로젝트 이창길 대표


개항로프로젝트를 처음 접한 것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였다. 처음에는 ‘요즘 감성’의 가게들을 소개하는 채널이려나 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십 년 자리를 지켜 온 ‘찐’ 노포들, 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애정어린 이야기들로 채워진 하나의 근사한 세계였다. 이런 개항로만의 진한 감성을 제대로 느끼게 된 건 ‘개항로맥주’를 통해서였는데, 개. 항. 로. 예스러운 글씨체로 한 자 한 자 힘 있게 적어 내려간 진갈색의 맥주병은 개항로프로젝트가 노포와 함께 서로 잘하는 것을 살려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이창길 대표는 2018년,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아 개항로프로젝트를 결성했다. 그 후 이비인후과 건물을 개조해 카페로 변화시킨 ‘브라운핸즈 개항로’를 필두로 현재 열다섯 개의 공간으로 확장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개항로맥주’, ‘개항로 이웃사람’ 등 지역 사람들과의 다양한 협업을 통해 백 년 가까이 쌓인 개항로의 내공을 세상 밖으로 알려내고 있다. 이 대표의 말처럼 개항로는 ‘레트로’라는 트렌드와 구분되는, ‘클래식’ 그 자체로 보였다.


기억에 남는 사람과 장소에는 ‘자기다움’이라는 공통의 맥락이 흐른다. 개항로프로젝트 또한 개항로의 자기다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고, 그 결과물이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 명동을 이루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카피되지 않는 지역만의 특성’을 고민해볼 것. 이창길 대표는 이렇게 조언했다. 명동의 ‘자기다움’은 무엇이며, 명동은 앞으로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옛것과 새것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며 시너지를 내는 개항로에서 그를 만났다. 





Q. 개항로프로젝트를 처음 접할 독자들을 위해 개항로프로젝트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과거 개항로는 대형 자본과 인프라가 축적되어 있는,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관공서의 이전과 주변 지역의 개발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폐업한 가게들이 방치되어 있는 황량한 동네가 되었어요. 저희는 개항로에서 역할이 끝난 건물들을 발굴해 현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기획, 디자인해 채우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Q.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개항로를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어요. 중, 고등학교를 이 동네에서 나와 제게는 놀이터나 다름없던 곳이었죠. 당시에는 백화점에서도 팔지 않는, 유행하는 옷을 팔던 곳이 개항로였습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열아홉 개의 극장이 있었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고 자란 동네가 저물어 간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고, 여기에 새로운 콘텐츠를 채워 넣으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과거의 향수 때문에 개항로를 택한 것은 아닌데요. 인천의 지리적 위치는 영국의 리버풀, 미국의 뉴욕, 일본의 요코하마와 비슷해요. 이 도시들은 과거 공업지대였지만 국가가 발전하면서 예술인들이 문화를 불어넣고, 결국 시민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인천의 현재는 그들의 과거와 비슷해요. 현재는 공업지대로 쓰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를 품고 시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천은 특이한 도시 개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서울은 부지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보통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지만, 인천은 기존의 건물을 건드리지 않고 갯벌을 메우는 식의 개발을 해왔어요. 그렇기에 개항로 같은 구도심에 오래된 건물과 노포들이 자연스럽게 보존될 수 있었죠. 게다가 개항로는 도로 폭이 좁아 사람들이 도로 좌우를 가로질러 자유롭게 다니는 편인데요. 도로 양쪽이 골고루 재생될 수 있는 조건인 셈이죠. 그런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Q. 개항로프로젝트의 매력은 감각적인 공간과 노포인 것 같습니다. 특히 주변 노포들을 소개하는 ‘개항로 이웃사람’이 인상적인데요. ‘개항로에는 이웃사람이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따뜻하게 와 닿았습니다.


개항로의 예전 명성은 서울로 치면 명동과도 같았어요. 하지만 인천이 개발되면서 개항로는 슬럼화됐죠. 그 안에는 100년이 넘은 건물도 더러 있고, 동네와 가게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그래서 개항로에는 노포의 비율이 높습니다. 40년 넘게 자리를 지켜 온 예순 개 이상의 노포들이 여전히 영업 중이에요. 


처음에는 개항로에 방문해 주시는 분들의 행선지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개항로 이웃사람’을 기획했어요. 개항로가 만든 공간뿐 아니라 매력적인 노포들까지 알려냄으로써 유입을 늘리자는 취지였죠. 가령 개항로프로젝트가 만든 열 개의 공간에 더해 열 개의 노포를 소개하면 사람들의 선택지는 스무 개로 늘어나는 식으로요. 


인터뷰를 통해 지역과 가게에 대한 인문적인 인사이트를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장님들을 만나면서 그런 접근법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신 분들은 지역재생이나 문화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대부분 중장년층인 그들이 살아 왔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다르니까요. 거절도 많이 당했죠. 저희가 알려낸 곳들은 그 중 일부에 불과해요. 





Q. <이면도로>의 첫 번째 이슈, ‘헤리티지’편에서도 노포들을 더러 인터뷰했는데요. 몇십 년간 장사를 해오며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시는 것을 들으며 힘이 나기도 했습니다. ‘개항로 이웃사람’에서 주로 담아낸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보통 사람들은 노포가 가진 조리법이나 맛의 비결을 궁금해하지만 저는 어떻게 한자리에서 50년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궁금했어요. 화려했던 과거를 지나 지역이 쇠락한 지금은 어떤 기분이 드는지도요. 그런 분들이라면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가 있을 것 같고, 이제 막 창업을 하려고 하는 청년들에게 드는 생각이나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을 것 같았어요. 


인터뷰를 통해 끌어올린 감동적인 인사이트는 없었지만 한 인간이 40년 이상 같은 일을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어요. 특히 중앙옥 사장님이 해주신 ‘그날이 그날처럼 하는 거야’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데요. 과거의 타성에 젖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자는 한결같은 마음에 깜짝 놀라고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그것은 분명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시간과 내공이 퇴적된 말이었죠.



Q. 과거와 현재의 공존, 단순히 같은 동네에 머무르는 것에서 나아가 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노포들을 어느 정도 알려내면서부터 단순하게 그들을 알려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연히 돕기만 할 게 아니라 함께 가치를 만들어 내고 싶었고, 서로에게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었습니다. 


‘개항로맥주’의 패키지는 60년 이상 글씨를 써오신 전원공예사목간판 전종원 어른의 글씨가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삼화페인트 가게 최명선 어른이 모델을 해주셨고요. 만약 우리가 전문 모델을 쓰고, 인기 있는 옛날 글씨체를 썼다면 그것은 단순히 ‘레트로’가 되었을 테죠. 하지만 노포 어른을 모델로 내세우고 노포 어른의 글씨가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클래식’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단단하게 쌓인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따라할 수 없으니까요. 





Q. 개항로맥주를 처음 봤을 때의 강렬한 느낌이 잊혀지지 않는데요. 협업을 이끌었던 개항로프로젝트뿐 아니라 노포와 사장님들의 특색이 잘 드러나 보였습니다. 


개항로맥주를 기획할 때 우리에게는 지역 술에 대한 정의가 필요했어요. 물론 검색을 통해 지역 술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를 알아낼 수 있겠지만, 저는 지역 술을 ‘지역성을 가미한 보편적인 술’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성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따라할 수 없는 시간을 가진 노포 어른들과 협업을 한 것이죠. 


술의 종류를 라거로 한 이유는 간단해요. 보편적인 술이니까요. 보통 수제맥주를 떠올리면 개성 강한 에일을 떠올리곤 하는데, 그런 종류의 술은 ‘보편적인 술’이라는 정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저희는 ‘도시재생’도, ‘로컬’도 모르는 동네 아저씨들도 쉽고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술을 원했거든요. 때문에 기성 맥주병의 사이즈와 같은, 500ml 용량의 라거가 탄생한 거예요. 게다가 인천에서만 판매함으로써 사람들이 인천, 그리고 개항로에 와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Q. 노포 어른들과의 협업은 분명 그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개항로맥주의 모델이 되어 주신 삼화페인트 가게 최명선 어른은 원래 극장 간판을 그렸어요.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2002년, 최민수 주연의 영화 [리허설]의 간판 작업을 마지막으로 직업이 사라졌죠. 자신이 가진 능력이, 시대에 맞지 않아 사라지는 느낌을 떠올려 보신 적 있나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로 인해 전원공예사목간판 전종원 사장님도, 삼화페인트 가게 최명선 사장님도 일감이 늘었어요. 기쁜 일이죠. 





Q. 앞으로 기획 중인, 노포들과의 협업이 있으신가요?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공간의 역사와 기획 의도를 듣고 나면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더 많은 분들이 개항로를 알고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미식투어를 기획하고 있어요. 투어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개항로프로젝트의 가게와 주변 노포들을 둘러봅니다. 이용자들의 성향과 소비습관을 고려해 여러 테마의 코스를 구상하고 있어요. 투어에 참여해 주신 분들께 드릴 기념품도 고민하는 중이고요.



Q. 사람들을 지역으로 유입시킬 수 있는 지점을 계속 고민하고 계신 것 같네요. 현재 숙박 시스템도 기획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개항로에서 숙박을 고려할 때 선택지가 빈약하다고 느꼈어요. 여기서 숙박을 하려면 근처의 러브모텔이나 영종도의 대형호텔에 가야 하거든요. 특히 대형호텔의 경우 지역을 여행한다기보다 호텔을 여행한다는 기분이 들곤 하는데요. 이런 환경 속에서 개항로에 찾아 주시는 분들이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선택지를 찾다 보니 ‘개항호텔’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개항호텔’의 슬로건은 ‘stay in local’이에요. 호텔을 기점으로 열다섯 개의 개항로프로젝트 공간과 근처의 노포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데요. 호텔에 지역을 큐레이션하는 거예요. 개항로프로젝트의 공간, 그리고 노포들이 이미 있기 때문에 공간을 채울 콘텐츠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조식부터 놀거리까지, 낮과 밤 문화를 담을 수 있는 공간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여행코스를 제안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여기에 미식투어가 더해지면 단순히 개항로를 찍고 가는 것이 아닌, 지역에서의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Stay in local, 간단하고 명료한 슬로건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로컬이라는 단어는 많은 곳에서 쓰이고 있지만, 이에 대해 주체마다 내리는 정의도 제각기 다른 것 같은데요.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로컬은 무엇인가요?


로컬에 대한 정의는 차고 넘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의 로컬을 정의하자면 ‘젊은이들이 실험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Q. <이면도로>의 슬로건은 behind the city & local인데요. 여기에는 명동에서 로컬성을 발견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대표님이 말씀해 주신 로컬의 정의를 미루어 봤을 때 명동은 어떤 실험이 일어나기에는 진입장벽이 높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앞으로 명동을 재미있는 콘텐츠로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생각해 보면 좋을까요?


이미 초반에 개항로프로젝트를 소개하며 ‘현시대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콘텐츠를 만든다’고 했는데요. 시대별로 지역에서 원하는 것이 다를 텐데, 현재 명동이라는 지역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콘텐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지금, 명동을 이루고 있는 주된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곳에서 복제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고요. 


명동은 로컬과 글로벌함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이 아닌가 싶어요.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로컬과 글로벌을 무 자르듯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해요. 코로나가 종식되면 개항로 또한 글로벌해질 수 있겠죠. 중요한 것은 무엇이 로컬이냐, 글로벌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 안에 존재하는 지역만의 특성을 찾아내는 거예요. 개항로에는 명동에는 없는 노포들이 많아요. 그리고 조금만 걸어도 그 노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고요. 거기에서부터 출발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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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the city & 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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