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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당신을 만나러 가는 크리스마스

by 시니어더크


2024.12.25 (수) 맑음


사랑하는 정숙 씨,

메리 크리스마스!

몇 날 며칠,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그곳을 다녀와야만

비로소 제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곤 하니까요.





아침이 늦게 시작됐습니다.

어제저녁에 미뤘던 설거지를 아침에 마쳤습니다.

당신이라면 이런 게으름은 절대 없었겠지요.

당신은 늘 그 즉시 설거지를 끝내고,

물기 한 방울 없이 말끔히 닦아 찬장에 정리하곤 했잖아요.

하지만 당신이 없는 요즘 저는 자꾸 나태해지네요.

그래도 오늘은 당신을 닮아보려 노력했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물기를 닦아 하나하나 정리했어요.


아이들도 오늘은 늦잠을 잤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늦잠이 허락되잖아요.

일어나서 각자 세수를 하고, 당신을 만나러 갈 준비를 했습니다.


오늘은 교회에 가야 하는 날이기도 했죠.

크리스마스니까요. 떡도 나눠준다 했지만,

당신이 먼저 보고 싶었습니다.

예배는 집에 돌아와 영상으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발걸음이

제겐 오늘의 기도이자 예배 같았으니까요.







오전 11시 30분, 출발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약 1시간 20분이 걸린다고 알려줍니다.

우리 가족은 예전부터 길 위의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행길에는 늘 휴게소에 들러 간식을 먹거나 식사를 했었지요.

오늘도 그 습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벚꽃길 휴게소에 들러 아이들은 가락국수와 김밥을,

저는 팥죽을 먹었습니다.





팥죽을 먹으며 동짓날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있었다면 제가 팥죽을 끓여줬을 텐데, 당신이 없으니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먹으며 당신과 함께했던

따뜻한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팥죽의 진가를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젊어서 그럴까요?


당신이 있는 곳에 가는 내내 걱정이 앞섰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혹여 차가 미끄러지면 어쩌나,

차를 멀리 세워두고 걸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있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로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햇빛도 따사롭게 비춰 차가 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마치 당신이 우리가 오는 길을

환하게 밝혀준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화강석 위에 얇게 얼음이 얼어 있었습니다.

아들이 얼음을 치우자 아주 깔끔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생화를 준비해 갔어요.

겨울이라 꽃이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잠시라도 향기를 맡으며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꽃을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앞으로도 당신을 만날 때마다

생화를 준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신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뒤를 돌아보니,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시사철 꽃과 단풍으로 물드는

그곳의 아름다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습니다.


당신도 전에 우리가 함께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랬지요.

“참 예쁘다”라고 감탄하며 풍경을 즐겼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당신도 그곳에서 부모님, 오빠, 새언니와 함께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당신을 만나고 난 뒤, 가평 시내로 내려와 한 음식점에서

오리백숙을 먹었습니다.

오리백숙과 누룽지탕, 막국수까지 푸짐하게 먹고 나니

저녁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이후 남이섬 입구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남이섬은 당신과 함께 다녀왔던 곳이죠.

오늘도 그 배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오가는 모습을 보며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디를 가든 당신과의 추억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집으로 돌아와선 쿠키와 나초에게 밥을 챙겨주고,

낮에 못 드렸던 예배를 영상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쓰며 당신과 보낸 오늘 하루를 되새겼습니다.


정숙 씨,

당신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참 낯설고 허전합니다.

하지만 당신과 나눴던 추억이 제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쉽니다.


다음 주 새해 첫날, 49제가 되는 날에

다시 당신을 만나러 갈게요. 그때까지 잘 지내요,

사랑 정숙 씨,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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