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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대통령을 뽑던 날

2025.6.3.(화)

by 시니어더크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을 뽑는 날.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 시간, 나는 집 근처 초등학교로 향했다. 그곳은 오늘 하루, 대통령 선거를 위한 투표소로 문을 열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숙 씨와 함께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느리지만 단단한 걸음으로 나란히 들어서곤 했던 그 길. 하지만 오늘은, 축 처진 어깨 위에 쓸쓸함 하나 더 얹은 채 홀로 걷는다.


학교 정문 앞엔 이미 긴 줄이 서 있었다. 손에 손을 맞잡은 부부, 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부모, 그리고 지팡이에 의지한 어르신들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과 바람을 안고 조용히 줄을 서 있었다.


누구도 크고 요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각자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마치 이 하루가 단순한 투표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 가는 시간인 듯했다.


나는 천천히 줄에 섰다. 아내가 있었더라면 이런 풍경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을 것이다. "사람들 참 성실하다" 하며, 우리의 투표도 하나의 성실함이라 말했겠지.


한 표를 던지고 돌아서는 길.

나는 오늘, 내 마음 한구석을 아내와 함께 걷고 있었다.


선거는 늘 혼란의 경계에 놓여 있다.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희망과 실망, 안도와 분노가 갈라진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짓눌러왔던 갈등과 미움,

지치도록 이어졌던 편 가르기 싸움이

이번만큼은 조금 가라앉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용히 사람들의 마음 위에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표를 던지는 손끝에도,

줄을 서 있는 눈빛 속에도

그런 바람이 스며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깊은 밤, 결과가 발표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제2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압도적인 표차였다.


화면 속 당선자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다.
그 안에는 책임의 무게와 다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나라를 이끄는 자리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 나라는 오랜 시간,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정치적 혼란과 도를 넘은 혐오,
끝없는 대립과 불신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서로를 의심하고, 말 한마디에도 등을 돌리는 풍경.
우리가 꿈꾸던 '함께 사는 세상'과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하지만 오늘,
국민은 다시 희망을 선택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대신,
포용과 공존의 길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정치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고,
대통령이란, 수많은 차이를 하나로 엮어야 하는
실타래의 중심이 되어야 하니까.


문득, 수십 년 전 첫 투표하던 어린 날이

떠올랐다.
손에 도장을 쥐고
긴장된 마음으로 기표소에 들어갔던 그날.


그때도, 지금도
표를 찍는 손끝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나 하나의 선택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품으려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는 것.


앞으로의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고,
국민의 기대도 크다.


오늘이라는 여름 첫 자락에
우리는 다시 한번 새로운 시작을 허락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알고 있다.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나누고, 때로는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가 지도자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개표방송을 보며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이제 나라가 좀 나아질까요?"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지."


희망은 언제나 쉽게 오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처럼 많은 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면,

그 희망은 어쩌면 조금 더 선명해졌을지 모른다.


바람은 여전히 분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엔 이제 확실히 여름 기운이 느껴진다.

계절은 어느덧 봄을 지나, 초여름의 문턱에 다다랐다.


무언가 막 피어나려는 시간.

오늘 우리가 내디딘 선택이

한 그루 나무처럼 이 땅에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누구든 그 아래에서 쉬어갈 수 있게,

그늘이 되고, 바람이 되고,

조용한 안식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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