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지 못한 길, 마음으로 남은 자리
2025.6.11 (수)
한낮의 태양이 무섭게 내리쬐던 날이었다.
하늘은 마치 이 땅의 모든 물기를 증발시키려는 듯, 거침없이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기온은 31도까지 치솟았고, 햇살은 피부 위를 눌렀지만 마음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청와대를 처음,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걸어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늘 아래 들어서면 숨이 놓였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뺨을 스치고, 마음까지 맑아졌다.
혹시 습도까지 높았다면 불쾌한 기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날의 청와대는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바람이 곁에 있었다.
청와대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새 정부가 다시 이곳으로 집무실을 옮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 관람이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예약을 마쳤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내 생엔 다시없겠지."
그 마음 하나로 길을 나섰다.
경복궁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고 했는데,
경찰차들과 경찰버스가 길을 막고 있었고, 뭔가 일이 있었는지 진입이 쉽지 않았다.
조계사를 지나고 좁은 골목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다시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길을 찾는 수고조차 이 산책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경복궁 담장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청와대의 푸른 기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지붕 하나가 이토록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줄은 몰랐다.
TV 속에만 존재하던 장면이 현실로 다가왔고,
한 시대의 풍경 속을 직접 걷는 느낌이었다.
춘추문을 지나 첫 발걸음은 대통령 관저였다.
청와대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곳.
경사는 생각보다 가팔랐고, 다리엔 천천히 무게가 쌓여갔다.
길 중간, 오래된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침류각.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을 가진, 이제는 조용한 문화재로 남아있다.
그 앞에 서서, 흘러가는 시간의 냄새를 맡았다.
관저를 내려오니 청와대의 상징, 본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줄 끝엔 '대기시간 90분'이라는 표지가 놓여 있었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디지만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의 마음이 닮아 있었을 것이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나."
레드카펫이 깔린 로비에 들어섰을 때, 마음이 조금 설렜다.
카펫 위를 걷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지나간 수많은 시간과 발걸음의 자취를 밟는 듯한 기분이었다.
1층에는 국무회의가 열리는 세종실과,
영부인의 집무공간이던 무궁화실이 이어졌다.
벽면에 걸린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초상화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그들의 얼굴에서 흐른 시간들이, 이곳을 채우고 있었다.
중앙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대통령 집무실이 나타났다.
책상 하나가 커다랗게 놓여 있었고,
그 앞에 서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자리에 앉아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을 그들의 무게,
국가의 행방을 고민해야 했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한 사람의 리더가 아닌,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그 책상 앞에서 조용히 마음속 기도를 올렸다.
이제 이 책상에 앉게 될 대통령이, 국민을 위한 길을 고민해 주기를.
그 고민의 방향이, 나와 내 아이들의 삶에 닿아주기를.
본관을 나와 정면을 바라보니
연초록 잔디밭이 시원하게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옆으론 아직도 많은 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잎사귀는 빛을 머금었고, 꽃들은 그늘 속에서 조용히 피어 있었다.
영빈관은 한산했다.
안에는 아무 가구도 없이 넓은 공간만이 남아 있었고,
그 빈자리는 오히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고요한 기운 속에서, 하루의 관람이 마무리되어 갔다.
정문 앞엔 빨간 글씨로 "청와대는 국민의 품으로"라고 새긴 구조물이 있었다.
언젠가 철거될지도 모르지만,
그 문장만큼은 오래 기억되고 싶었다.
청와대를 둘러보는 데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잘 정돈된 조경과 북악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맑은 공기,
그리고 그 안을 채운 고요한 무게들.
모든 것이 화려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아 더 깊이 마음에 남았다.
과거의 대통령들 중 몇몇을 제외하곤,
이곳은 사적인 욕심보다는 공적인 책임으로 채워졌던 공간처럼 보였다.
걸으며 느꼈다.
한 나라의 중심이란,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도 소박해야 한다는 걸.
그리고 마지막, 청와대 정문을 나서며 한참을 서 있었다.
푸른 기와 아래 그 많은 시간을 함께 걸어온 사람,
정숙 씨가 문득 떠올랐다.
함께 예약을 하고,
함께 뜨거운 햇살 아래 경복궁 담장을 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여보, 여기 참 좋다"
하고 웃었을 그 얼굴이, 그 웃음이 너무 또렷하게 떠올랐다.
오늘의 이 걸음이
그녀와 함께라면 더없이 완벽했을 것이다.
청와대를 다녀온 하루는 그렇게,
함께하지 못한 사람을 가장 깊이 느끼는 하루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