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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참 빠르다

그녀의 몫이었던 하루

by 시니어더크

2025.6.10 (화)


사흘 뒤면 정숙 씨가 떠난 지 꼭 일곱 달이 된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겉으로 보기엔 "집안일이야 뭐 별거 있겠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나도 그랬다.

회사에 나간다고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하는 게 다 아니겠어?" 하고 가볍게 넘기며 정숙 씨에게 모든 걸 맡겨버린 적도 있다.


과장, 차장으로 가장 바쁘게 일하던 시절엔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사원, 대리 시절에도 왜 그리도 차트를 쓸 일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보고가 있을 때면 사장님께 브리핑용 차트를 써야 했다. 여관방을 하나 잡아두고 밤새 기획 보고서를 차트 형식으로 정리하곤 했다.


다음 날, 감긴 눈을 억지로 뜨며

부장님과 함께 차트를 들고 사장실로 향하려 비서실에 전화를 하면

"사장님이 급한 외출 중이라 내일 보셔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시간에도 정숙 씨는

아이들과 함께 긴 밤을 보내며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아내를 뒤로한 채, 밤을 꼬박 새워 보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시절은 아직 컴퓨터가 널리 쓰이지 않던 때였다.

애플에서 처음 나온 컴퓨터는 한글 글자 하나가 메추리알만 해서,

한 줄에 몇 자 적을 수도 없었다.


군에서 활용하던 차트판을 회사에서도 도입해서 쓰고 있었다.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군 시절에도 회사에 들어와서도

밤샘 작업에 자주 불려 다녔다.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다 보면, 눈 한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집에서 기다리던 아내에게 오해아닌 오해를 사기도 했다.

'혹시 일하는 척하고 외박하는 건 아닐까'하고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땐 나도 아직 사원이었고,

과장이나 차장님들도 함께 작업을 하던 분위기라 외박은커녕, 세수도 못 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보고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작업 시간은 늘 부족했다.

그렇게 바쁘게 밤을 새워도, 아침에 보고가 취소되는 일도 허다했다. 성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사원이, 대리가 힘이 없었다.

그게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나라에 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내가 있던 부서는 개발사업부였고, 빌딩, 백화점, 오피스텔, 대학병원, 대학교, 골프장, 항만 매립사업까지

손댄 사업이 수두룩했다.

건축부에서 현장을 뛰다가 본사로 들어오니

이 같이 일이 많은 부서로 발령이 난 것이다.


승진은 빠르게 되었지만, 집에서는 낙제점수였을 것이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 되었다.


정숙 씨는 집안일만 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직장을 다닌 워킹맘이었다.

을지로에 있던 농협본부 경리사원이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농협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침마다 출근 준비를 하며 아이들의 옷을 챙기고, 집안일을 마친 후에야 회사로 향하던 그 모습이 이젠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살림과 일을 병행하는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저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걸 알았기에 그 이후부터는 아내를 황후같이 모신 것 아닌가 한다.


요즘 나는

더럽혀진 청소기를 분해해 닦는 일이 이렇게 번거롭고 힘든 줄 처음 알았다.

겉으로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사 하나 풀고 먼지 낀 필터를 꺼내고

한참을 걸려 말끔히 닦고 다시 조립하는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작은 일 하나도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동안 정숙 씨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왔던 것이다.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덜하지만,

장정 셋이 함께 살고 있으니 일이 없지는 않다.

게다가 쿠키와 나쵸까지 있으니 매일 할 일이 생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요즘은 매달 한 번씩 정숙 씨에게 다녀오고 있다.

그런데도 불안한 마음이 든다.

혹시 이 간격이 점점 길어지지는 않을까.

혹시 잊히지는 않을까.


며칠 전, 정숙 씨 친구분께서 오랜만에 내 블로그에 댓글을 남기셨다.

안부를 물으며 이렇게 물으셨다.

"아직도 눈물이 나세요?"


겨우 7개월인데, 눈물이 마르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요즘은 억지로 울지 않으려 한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렇다고 눈물이 마른 것은 아니다.

다만, 조심스럽게 감추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정숙 씨의 기억과 함께 말이다.


살아가는 일에 정신을 쏟다 보면 세월은 금세 흘러간다.

곧 8개월, 9개월, 그리고 어느새 1년이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헌신적이었고

가정을 위해 늘 힘써주던 아내를

나는, 이 땅에 남은 생이 다할 때까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다, 그리고 고마웠다. 정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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