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그잔 하나, 그리움 하나
조용한 밤이다. 식탁에 앉아 있는 내 귀로
잔잔한 음악 한 곡이 흘러든다.
무슨 말을 꺼낼까, 무엇부터 기억해야 할까.
머그잔 하나만 놓인 채, 식은 커피를 천천히 마신다.
예전 같으면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조용히 커피를 건네며,
"오늘은 어땠어요?" 하고 묻던 목소리.
지금은 아무 말도 없다.
그런 고요한 밤이면,
오히려 모든 게 더 생생해진다.
대화 하나, 눈빛 하나, 그 모든 순간들이
식탁 위에 얹힌 찻잔처럼 또렷하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귀를 간지럽히는 익숙한 멜로디와 첫 소절이 순식간에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다.
심장이 조용히 뛰는 소리도 귀에 들리고,
기억 속 웃음이 바람처럼 스쳤다.
노래 제목은 <장미>.
그 곡을 부른 사람은 '사월과 오월'.
1980년대 포크송으로 이름을 알렸던 남성 듀엣이다.
그중 한 명, 이름은 '이지민'.
한때 나와 같은 회사에 다니던 친구였다.
늘 성실했고 언제나 능동적으로 움직이던 사람.
같이 지방에 가서 아파트 분양도 함께했던 사이였다.
나이도 같아서 마음이 잘 맞았고,
분양을 성공리에 마치고 본사로 복귀했다.
그곳은 이천에 있는 아파트였다.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일했고, 과장으로 진급도 함께했다.
개발사업을 위해 부단히 뛰던 어느 날,
그 친구가 돌연 사표를 냈다. 명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월급쟁이로는 앞날이 불투명해서일까?
후에 소문으로 들었다. 강남에서 주점을 하며,
다시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고.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긴 머리와 수염을 기른 채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친구는 회식 때면 단연 인기였다. 술집 무대를 독차지했고,
그 집 밴드들조차 감히 다가서지 못할 정도였다.
무대 위에서 눈을 감고 기타를 치며 부르던 이 노래 "장미",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당신과 겹쳐졌다.
당신은 장미처럼 다가온 사람이었다.
처음엔 조심스러웠고, 가까이 갈수록 향기가 짙어졌다.
말을 아끼던 그 웃음 속에,
가끔은 가시처럼 날카로운 침묵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곁에 있는 순간들이 모두 고백이었다.
커피를 함께 마시던 평범한 아침,
빨래를 걷으며 나누던 농담, 함께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그 사람.
그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기억난다.
일산 호수공원에서 열린 장미꽃 박람회.
햇살 좋던 5월, 몇 년도인지는 희미하다.
손을 꼭 잡고 걸었던 그 꽃길. 당신은 꽃마다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이건 달콤하네." "이건 마음이 맑아지는 냄새야."
수백 송이 장미보다 당신의 얼굴이 더 밝게 피어 있던 날.
그때 찍은 사진을 꺼내 보면, 당신은 여전히 꽃보다 환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떠난 뒤,
그 호수공원에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
장미는 여전히 피지만 향기는 닿지 않는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발끝마다 그리움이 묻어나
도저히 가서 걸을 수가 없다.
이제 내가 가는 곳은,
당신이 누워 있는 조용한 공원이다.
매달 한 번씩, 되도록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간다.
당신이 좋아하던 연분홍빛, 가끔은 하얗고 담백한 장미.
꽃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새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정숙 씨, 이건 어때요?" 속으로 말을 걸고,
손끝으로 꽃잎을 조심스레 만지며 마음속 당신을 그려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날이면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괜찮아요, 괜찮죠."
꽃을 들고, 당신이 누워 있는 잔디밭에 앉는다.
그곳은 햇살이 가장 따뜻하게 내려앉는 자리.
바람이 스치면 꽃잎이 흔들리고, 그 틈으로 당신의 웃음이 떠오른다.
그 모습은 기억 속이 아닌, 마음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하다.
그 잔디밭에서 나는 종종 말을 건넨다.
"이번 달엔 조금 늦었네요."
"요즘 날씨가 괜찮아요."
대답은 없지만, 어쩐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자꾸 말을 붙이게 된다.
돌아오는 길엔, 늘 같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사이로 당신이 웃으며 바라보는 듯한 느낌.
"꽃, 예쁘죠?" 그 한마디가 자꾸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집에 도착해, 식탁 앞에 다시 앉는다.
여전히 머그잔 하나만 놓여 있는 그 자리에.
그 속에 담긴 커피는 이내 식지만,
그리움만은 좀처럼 식지 않는다.
매달 한 번, 꽃과 함께 마음을 담아 전하는 이 조용한 기록.
언젠가 그곳에도 닿을 수 있을까.
오늘처럼 조용한 저녁이면,
그리움이 향기가 되어 가슴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