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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미야의 글빵연구소 제1기 졸업작품

by 시니어더크


화면 속 배우가 흘리는 눈물이 어느새 내 두 눈에서도 쏟아져 내렸다. 드라마가 아니라, 그것은 분명 나의 이야기였고, 내 아내의 삶이었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나는 어제에 이어 또다시 드라마 한 편을 보았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릴 때마다 마음은 조금 차분해지고, 화면 속 이야기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런데 문득 걱정이 스쳤다. 혹시 드라마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게으름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에 기대어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습관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달래 보았다. 지금은 여행 준비로 생업을 잠시 내려놓은 때라, 비어 있는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시기다. 자연스레 눈이 태블릿을 향하고, 화면에 머무는 것도 어쩌면 잠시 허락된 여유일 것이다. 어제의 긴장과 분주함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짐한다. 이 시간이 길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드라마의 달콤한 이야기 속에 안주하지 않기를. 창가에 고즈넉이 쌓여 가는 빗소리처럼, 나도 조용히 나를 추스르고 일상을 준비해야 한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책장에 쌓여 있던 책들을 꺼내어 한 장 한 장 넘기며 다시 살아 있는 호흡을 느껴보고 싶다. 그 책 속의 이야기들은 아마 드라마보다도 더 오래 내 곁에 남아, 앞으로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줄 것이다.


오늘 본 작품의 제목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제6회 경상북도 영상콘텐츠시나리오 김미경 작가의 우수상 수상작인 '당신은 내 인생'을 각색한 드라마였다. 나는 아직 1회와 2회 중간까지 보았지만, 1회의 마지막 몇 분이 나를 단숨에 붙잡았다.

배우 김해숙 씨와 이덕화 씨의 열연은 놀라웠다. 그 장면은 마치 정숙 씨와 나의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해, 순간 숨이 막히듯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여주인공은 뇌종양 판정을 받고, 모든 병원에서 치료 불가 판정을 받는다. 작가인 남편과 딸은 끝까지 방법을 찾으려 하지만, 이미 길은 막혀 있었다. 이어지는 장면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암의 통증에 몸부림치며 방바닥을 뒹구는 아내, 그리고 쟁반에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가 놀라 달려와 아내를 끌어안고 함께 울부짖는 남편. 그 모습은 곧 나 자신이었고, 정숙 씨였다. 오래 눌러두었던 기억이 벼락처럼 터져 나와, 나 역시 화면 앞에서 소리 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여주인공은 서서히 마지막을 준비한다. 영정사진을 찍고, 장례식장을 예약하는 모습은 담담하면서도 처연했다. 마치 떠날 날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남은 시간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윽고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에 오른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깊게 숨을 고른다. 발아래로 펼쳐진 가을의 풍경은 아름다웠으나, 그 빛깔 속에는 이별의 그림자가 진하게 깔려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두 사람은 함께 걸어온 지난 세월을 하나하나 되짚듯 이야기 나누었다. 그 말들은 더 이상 긴 대화가 아니었다. 눈빛과 손길, 그리고 서로의 숨결이 그 모든 세월을 대신하고 있었다.



마침내 여주인공은 눈을 감는다. 그녀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 눈물은 남편의 눈물과 겹쳐 하나의 강물이 되어 흐른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내 두 눈에서도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스크린 속의 장면이 아니라, 분명 내 지난 삶의 한 장면을 다시 마주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김미경 작가는 어떻게 이토록 내 삶과 닮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마치 내 곁에서 정숙 씨의 긴 투병을 지켜본 사람처럼, 그녀의 고통과 우리의 눈물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래서 수상을 했을 것이다. 글은 결국 삶을 비추는 거울일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그 장면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 그러나 곧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도 과연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평생 글과는 멀리 살아왔고, 펜을 든 적도 드물었던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생각한다. 글은 기술이나 수사가 아니라, 결국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나의 하루, 나의 기억, 나의 사랑과 상실이 곧 글의 뿌리가 된다면, 어쩌면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이 기록조차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아내와 함께 걸어온 지난 시간을 나만의 언어로 남기는 이 작업이 결국은 누군가에게 닿는 울림이 되리라는 희망을, 나는 여전히 버리지 않는다.


2회의 장면에서는 여주인공은 남편 몰래 편지를 남겨두었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문장이 담겨 있었다.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하루가 다 가야 만날 사람도 없고, 보고 싶은 사람도 없죠?"

짧은 한 줄이었지만, 남편의 외로움과 고독을 깊이 어루만졌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정숙 씨도 내게 이런 마지막 편지를 남겨두지 않았을까. 그 마음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곧 현실이 스쳐 지나왔다. 연필조차 들 힘이 없어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편지를 남기기엔 너무나 고단했던 시간들이었음을 알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드라마 속 남편은 끝내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 텅 빈 집 안에서 허공을 바라보다가 농약병을 집어 들고, 모든 것을 끝내려 한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방해로 그마저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아내와 함께 올랐던 그 산을 다시 찾는다. 단풍이 물든 절벽 끝에 서서, 아내가 떠나던 순간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듯 몸을 던진다. 하지만 죽음조차 그를 데려가지 않는다. 남편은 살아남는다. 그것이 남겨진 자의 운명이자, 몫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를 따라가고 싶어도, 끝내는 살아내야 하는 무게. 그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동시에 나의 마음까지 무겁게 끌어내렸다.


나 역시 깊은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가 허공을 걷는 듯하고, 문득문득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나에겐 여전히 지켜야 할 이들이 있다. 아이들이다. 그들의 삶의 길을 곁에서 함께 걸어주어야 한다. 아버지로서, 남겨진 자로서 내가 맡아야 할 몫이다. 정숙 씨가 끝내 보지 못한 세상, 듣지 못한 노래, 만나지 못한 계절을 내가 대신 바라보고, 대신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곧 내게 주어진 책임이며, 동시에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도 여전히 숨 쉬는 자가 붙잡아야 할 단 하나의 의미, 그것은 끝내 남겨진 자의 삶을 살아내는 일이다.


오늘 본 드라마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었다. 배우의 눈물 속에서 나는 내 눈물을 보았고, 허구의 장면 속에서 나는 내 삶을 다시 만났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조차, 현실과 드라마가 서로 겹쳐져 하나의 장면처럼 아득하게 번져간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내 기억이 다시 드라마 속 장면으로 이어진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자리에서 나는 알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을 닮을 때, 가장 깊이 마음을 울린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몫은, 아내와 함께한 날들을 글로 남겨 누군가의 마음에 또 다른 울림을 건네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다시 깨달았다. 이야기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공감이 되고, 그래서 눈물이 된다.

언젠가 나도, 정숙 씨와 함께 걸어온 지난날들을 글로 남기고 싶다. 그날의 웃음과 눈물, 고통과 사랑을 수필 속에 담아,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게 남겨진 또 하나의 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붙잡으려는 길이 아니라, 사랑을 기록하고 나눔으로써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쓰며,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날들을 다시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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