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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빈자리에서 피어나는 그리움

고요한 아침, 멈춰버린 일상

by 시니어더크

2024.11.20.(수) 흐림


사랑하는 정숙 씨.

오늘도 여느 날처럼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당신과 함께 투석실로 향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였겠지요.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차리고, 휠체어를 준비하며 분주했을 텐데, 오늘 아침은 조용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빈 방, 텅 빈 침대, 그리고 고요한 시간이 유독 크게 느껴졌습니다. 당신이 내 일상 속에서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당신의 부재가 얼마나 깊은 공허로 다가오는지 새삼 느낍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목욕을 가보려고 했습니다. 예전에 당신도 자주 다니던 동네 목욕탕 말이에요. 그런데 그 목욕탕이 문을 닫았다더군요. 차를 몰고 먼 곳까지 갈까 하다가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결국 집에서 간단히 샤워를 했습니다.

샤워를 하다 문득 지난주가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떠나기 전날, 원래 목욕을 시켜드리려 했는데,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 결국 그 일을 하지 못했죠. 그 일이 아직도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요.


늘 내가 당신의 등을 밀어주던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지요. 당신이 편안한 표정으로 등을 맡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내 손이 할 일을 잃어버린 듯 허전했습니다. 어쩌면 이 공허함은, 더는 당신을 돌볼 수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슬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숙 씨, 당신을 목욕시켜드리는 일은 귀찮거나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고,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던 내 몫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 몫이 사라지고 나니,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죄 없는 내 등만 허무하게 문질렀습니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당신이 4년 동안이나 다녔던 경기웰니스 요양병원 투석실에 들렀습니다. 남은 병원비를 모두 정산하고, 그동안 당신을 돌봐주신 간호사님들께 롤케이크를 전해드렸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지만, 간호사님들 모두 따뜻하게 받아주시면서도 당신이 일찍 떠난 것을 무척 안타까워 했습니다.


사실, 내가 그분들께 커피나 작은 선물을 드린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투석받는 시간만큼은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덜 아프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더는 전달할 수 없다는 현실이, 다시 한 번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당신과 함께 걷던 길들이 떠올랐습니다. 늘 휠체어에 앉아 내 앞에 있던 당신. 지금은 그 자리가 비었지만, 길 곳곳에 당신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더군요.


저녁엔 아들이 퇴근하면서 물닭갈비 재료를 사 와 요리를 해주었습니다. 요리에 소질이 있는 아들이 만들어준 음식은 정말 맛있었어요. 그런데 식탁에 앉아 먹으며 당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가족은 언제나 네 명이 함께였잖아요. 이제 세 명이 마주 앉으니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 듯했습니다.


아들과 딸이 웃으며 나누는 대화가 참 보기 좋았지만, 그 대화 속에 당신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 한편을 자꾸만 아프게 합니다. 식탁을 정리하며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들아, 네가 만들어준 음식 참 맛있다"며 웃던 당신의 그 환한 얼굴이요.


정숙 씨. 오늘 하루도 당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당신이 없는 이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힘이 듭니다. 하지만 나는 살아가려 합니다. 당신이 남긴 사랑과 추억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겠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당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으로요.


당신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내게는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당신의 미소, 당신의 손길, 당신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요. 이제는 그 선물들을 내 마음 깊숙이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정숙 씨, 나는 약속합니다. 당신에게 쓰는 이 편지를, 내가 당신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써내려갈 거예요.


언제까지나 당신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영원한 동반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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