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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당신의 흔적 속에서 살아갑니다

당신의 자리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by 시니어더크

2024.11.19(화) 맑음


사랑하는 정숙 씨,
오늘도 늦게 눈을 떴어요. 당신이 없는 집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 아직도 낯설고 막막하지만,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도 조심스레 하루를 정리해가고 있어요. 오늘은 가구의 위치를 바꿔보고, 당신의 옷을 옷장 한편에 차곡차곡 접어두었답니다.


많은 이들은 떠난 사람의 물건은 버리라고들 해요. 하지만 난 도저히 그럴 수가 없네요. 당신의 옷을 모두 치워버리면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아 겁이 나요. 그래서 옷 하나하나 손끝으로 만지며, 당신의 체온을 기억하며 옷장 옆에 조심스레 쌓아놓았어요. 우리가 함께 덮던 이불도 여전히 덮고 자요. 그 안에는 당신의 온기와 향기가 남아 있어, 마치 당신이 내 곁에 있는 듯해 조금은 덜 외롭습니다.


당신이 누웠던 자리엔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강아지, 쿠키가 자리를 잡았어요. 쿠키도 당신이 떠난 걸 아는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네요. 밤이 되면 제 옆에 누워 잠이 드는 쿠키를 보며, 당신과 함께했던 밤들을 떠올려요.


화장대를 정리하다가, 당신 얼굴에 팩을 해주려고 사둔 알로에 팩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발견했어요. 끝내 제대로 써주지 못하고 당신을 떠나보낸 게 너무 아쉬웠어요. 그 팩은 딸에게 건넸어요. 예전에 라디오에서 받은 고급 팩이 얼마나 좋았는지, 당신이 더 받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던 모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런 기쁨을 더 자주 안겨주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고 미안해요.


당신이 떠나기 며칠 전, 새 화장품을 사자고 말했었죠. 그 약속도 끝내 지키지 못했네요. 하루하루 당신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는데, 모든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미안한 건,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단독주택에서 살게 해드리지 못한 일이에요. 정원이 있는 작은 집, 테라스에는 꽃이 만발한 화분, 담장에는 감나무와 사과나무, 작은 텃밭에서는 함께 고추와 깨, 상추와 고구마를 키우는 그런 집. 당신은 늘 그런 삶을 꿈꿨잖아요.


지난 몇 년간 친구네 밭에서 당신과 함께 작물을 키웠던 날들을 떠올려요. 그 작은 텃밭에서도 당신은 참 많이 기뻐했는데, 마음 한편에는 늘 미안함이 남아 있었어요. 당신의 소박한 꿈을 끝내 이루어주지 못한 게 제 평생의 한입니다.


이제는 늦었지만, 언젠가 내가 당신 곁으로 가는 날, 그곳에서는 당신이 꿈꾸던 집을 함께 지어봅시다.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 우리가 함께 가꿀 텃밭도 꼭 만들어서요. 매일 꽃을 보고 향기를 맡으며, 그리운 마음을 다독일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정숙 씨, 나는 오늘도 당신의 흔적 속에서 살아갑니다. 당신의 온기와 향기, 그리고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이 집 구석구석에 남아 나를 지켜주고 있어요. 당신이 없는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고단하지만, 당신을 떠올리며 한 걸음씩 나아가려 해요.


하늘나라에서도 평안하고 행복하시길,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리라 믿어요.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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