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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오늘 김장을 마치고,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함께였던 부엌, 이젠 나 혼자의 김장

by 시니어더크

2024년 11월 30일 (토) 흐림과 비.


오늘 드디어 김장을 마쳤습니다. 하루 종일 흐린 날씨에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졌지만, 어쩐지 그 비조차도 오늘의 고단함을 다독여주는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김장 자체보다도 이틀 전부터 시작된 준비 과정이 더 힘들었지만, 덕분에 오늘은 두 시간 반 만에 배추를 모두 버무릴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철저한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실감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김장을 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역시 당신이었습니다. 함께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당신의 모습, 매콤한 양념 냄새에 콧잔등을 찡그리면서도 금세 웃음 짓던 얼굴, 간을 보며 “조금만 더 단맛을 넣어야겠어” 하던 목소리... 이 모든 것이, 오늘따라 유독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김장은 그 시절과는 달랐습니다. 당신이 없는 부엌은 조용했고, 배추를 버무리는 손길엔 익숙함보다 허전함이 더 먼저 묻어났습니다. 김장을 하는 동안 무언가 마음속 한 부분이 텅 비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양념을 푸짐하게 버무려도 그 허전함은 메워지지 않더군요.


다행히 언니가 와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언니는 오늘도 당신 이야기를 자주 꺼내며 우리 사이의 끈을 단단히 이어주는 존재가 되어주셨습니다. 당신이 살아있을 때처럼, 여전히 가족을 위해 애쓰는 언니의 마음이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던 딸도 테니스장에서 돌아와 김장에 함께했습니다. 큰 배추를 자르고, 양념을 나르고, 무거운 김치통을 옮기며 어느새 다 자란 어엿한 모습으로 제 곁을 지켜주는 아이를 보며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습니다.


김장을 마친 뒤에는 딸이 떡볶이와 치킨을 시켜 모두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언니와 함께 앉아 먹으며 나눈 이야기들 속에서도 당신의 빈자리는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언니의 눈빛에도, 말끝에 맺힌 그리움 속에도 당신이 스며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언니는 당신의 집처럼 여기며 마지막 청소까지 도맡아 해 주셨습니다. 나이가 드셨음에도 매년 이렇게 도와주시는 모습에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양념은 넉넉히 준비한 덕분에 부족함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조금 남아서 내일이나 모레 배추를 더 사다가 마저 담그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김장이라는 큰일이 끝나고 나니, 딸은 개천가 산책길을 걸으며 마음을 달래고, 저는 오랜만에 자전거를 꺼내어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런데 김장이 끝나자마자 하늘에서 우박 섞인 비가 잠깐 쏟아졌습니다. 마치 당신이 “수고 많았어요” 하고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빗소리에 섞인 당신의 말 없는 위로가 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습니다.


저녁에는 아들이 와서 수육을 삶고 샤부샤부를 준비했습니다.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육수, 채소들이 퍼지며 풍겨오는 고소한 향기 속에도 당신의 흔적이 함께했습니다. 예전엔 네 명이 둘러앉아 떠들썩했던 식탁이었지만, 이제는 한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자리였지요. 당신이 앉았던 그 자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휘청거릴 때가 많습니다. 수육을 썰 때도, 국물을 덜어낼 때도, 당신의 손길이 선명하게 그리워졌습니다.


예전엔 김장 후 수육 한 점을 입에 넣으며 "올해 김치 양념이 아주 끝내줘!" 하며 웃던 당신이 있었지요. 당신의 칭찬 한마디에 고된 하루가 씻기듯 사라졌었는데, 이제는 그런 순간마저도 추억 속 한 장면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정숙 씨, 요즘 저는 매일같이 깨닫습니다. 저의 하루하루가 모두 당신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요. 함께 밥을 짓고, 함께 장을 보고, 함께 계절을 맞이했던 모든 순간들이 이젠 하나씩 그리움이 되어 돌아옵니다. 김장을 하면서도, 자전거를 타면서도, 식탁에 앉아 수육을 먹으면서도, 저는 내내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달력 한 장이 조용히 넘겨지는 이 밤, 다시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울립니다. 내일부터는 12월이 시작되고, 한 달만 지나면 2025년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새해가 반갑지 않습니다. 이제는 나이를 더한다기보다는, 당신 없는 세상에서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를 헤아리게 되거든요. 나이를 더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씩 덜어내며 당신에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정숙 씨, 이 밤도 깊어갑니다. 나는 오늘 김장을 마치고, 하루를 정리하며 다시금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평안하기를, 환하게 웃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곳에서 남겨진 나는 당신의 빈자리를 지켜가며, 당신이 남겨준 사랑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렇게 오늘도 당신을 향한 하루가 지나갑니다.


당신을 끝없이 그리워하며,

늘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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