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5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을 떠올리며

당신이 누웠던 자리

by 시니어더크

2024.12.5 (목) 흐림/비


사랑하는 정숙씨.

오늘은 편지를 조금 늦게 씁니다.
온종일 몸이 무거워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평소보다 훨씬 지친 하루였습니다.


이렇게 피곤한 날엔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곁에 있었다면, 조용히 다가와 제 등을 슬며시 토닥여 주었겠지요.
“고생 많았어요.”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해줬을 당신의 목소리가 아련히 떠오릅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딸과 간단히 저녁을 먹었습니다.
국을 데우고 밥을 퍼서 상을 차리는 일은 이제 제 몫이 되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네요.
당신의 손길이 담긴 저녁상이 그립습니다.


식사를 마치고는 곧장 누웠습니다.
자연스레 당신이 늘 누워 있던 자리를 찾게 되더군요.
혹시라도 체온이 남아 있을까 싶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곳엔 아직 당신의 숨결이 남아 있는 듯했어요.


당신이 없다는 사실은 매일 새롭게 다가옵니다.
매일 배우고, 매일 받아들이려 애쓰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힘든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경비 교육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여유롭게 나섰는데도 일찍 도착했더군요.
시계를 보니 8시 35분, 시작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습니다.


강의장엔 세 사람만 앉아 있었고,
조용한 그 공간에서 괜히 마음이 허전해졌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던 시간들이 자꾸 떠올라서였겠지요.


저는 맨 앞줄, 창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햇살이 스며드는 그 자리에 앉아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뒤쪽에서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며
하루를 버텨냈습니다.


강의는 여덟 시간 내내 이어졌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한 시간씩 버텼습니다.
교수님은 중간중간 “여덟 시간 앉아 있는 것,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시더군요.
감사한 말씀이었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으로 들려 더 와 닿았습니다.


가끔은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긴 병상 생활을 견디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시간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점심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무엇이라도 간단히 먹어야겠다 싶어, 지난번처럼 현대백화점으로 향했지요.


이번엔 9층 대신 지하 1층 푸드코트로 갔습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수제비를 주문했어요.
아마도 당신이 끓여주던 그 수제비가 그리워서였겠지요.


하지만 국물 한 숟갈을 뜨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건 당신의 수제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얇고 부드러워 씹는 맛이 없었고, 국물은 밍밍했습니다.


당신의 수제비는 달랐지요.
손으로 정성껏 치댄 도톰한 반죽,
멸치와 다시마로 깊게 우려낸 진한 국물,
무와 애호박이 어우러졌던 그 따뜻한 맛.
그 맛과 정성이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문득 서글프게 다가왔습니다.


오후 강의도 이어졌고, 마지막엔 시험이 있었습니다.
총 40문제.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거의 다 맞춘 듯합니다. 한두 문제 정도만 틀렸을까요.


결과와 상관없이 마음은 홀가분했습니다.
수료증을 손에 쥐었을 때, 종이 한 장이었지만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당신이 자주 다니시던 웰니스 요양병원 앞을 지났습니다.
그 길 끝에 당신과 함께 걷던 기억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괜히 발길이 근처 순대국집으로 향했지요.


신의주 순대국.
당신이 한 번쯤 먹고 싶어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순대국을 포장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딸은 먼저 와 있었습니다.
퇴근하자마자 곧장 왔나 봅니다.
딸과 둘이서 순대국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저녁 식탁, 여전히 낯섭니다.


아들 몫은 따로 덜어 두었습니다.
늦게 올 테니 데워 먹으라고 전해 두었지요.


그렇게 하루가 흘렀습니다.
교육도 마치고, 식사도 하고, 집안일도 했지만…
당신이 없는 하루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당신이 누웠던 자리에 몸을 뉘입니다.
그 자리에 누우면, 당신이 조금 더 가까이 느껴집니다.
당신이 아직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이라도, 저는 그게 좋습니다.


정숙씨, 오늘도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제 하루는 고단했지만, 당신에 대한 기억이
오늘 하루도 견디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눈을 감습니다.
잘 자요, 내 사랑.
내 사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4 대한민국 155분간의 게엄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