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눈 사이로 흐른 시간
2025.5.24 (토) 맑음
나의 사랑 정숙 씨,
어젯밤도 잘 지내셨나요?
오늘부터는 우리 약속대로,
좋은 기억만 떠올리며 살아가 보려 해요.
당신도 그곳에서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지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요즘은 당신과 자주 만나던 친구분들 소식도
이젠 잘 들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제, 참 반가운 일이 있었답니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분께서
오랜만에 제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글을 읽는 순간,
마치 당신이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그분의 말투나 따뜻한 표현들이
어쩐지 당신 목소리처럼 들려서
잠시 동안 마음이 뭉클했지요.
어제는 욕실 바닥 공사를 하려고 했는데,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 결국 미뤘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드디어 마음을 다잡고 시작했답니다.
운동도 하고 체력도 길렀다 생각했는데,
쪼그려 앉아 줄눈을 긁는 일이
이렇게나 힘들 줄은 몰랐어요.
역시 나이는 정직하더군요.
쿠팡에서 산 줄눈 제거 도구도 써봤는데,
그거 하나 믿고 덤볐다가 진이 다 빠졌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이 있을 땐, 이런 일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는 걸요.
당신을 씻겨드리고,
세끼 식사를 챙기고,
병원에 다녀오는 일이
그땐 어찌 그리 버겁지 않았을까요.
몸보다, 마음이 더 튼튼했던 시절이었겠지요.
당신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래도 오늘 작업은 잘 마무리했어요.
시멘트 자국만 조금 더 닦고,
내일 도착할 방수 테이프만 붙이면 끝이에요.
욕실 줄눈이 누렇게 변색되고,
곰팡이도 보여서 도저히 미룰 수 없었거든요.
작업을 끝내고 나니
욕실이 훨씬 밝고 깨끗해 보여서
혼자 흐뭇하게 웃었답니다.
당분간은 이 상태로 유지되겠죠?
앞으로도 집 안 군데군데
손 볼 곳들을 하나씩 고쳐가 보려 해요.
물론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요.
건강이 먼저니까요.
내일은 주일이에요.
몸이 좀 피곤해서 교회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좋아하던 찬송가를
혼자서라도 조용히 불러볼까 합니다.
정숙 씨,
오늘은 이렇게 화장실 이야기로
편지를 가득 채워버렸네요.
하지만 당신도 알잖아요.
우린 늘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로
하루를 나누곤 했잖아요.
앞으로도 무겁기보단,
가볍고 웃음 나는 일상 이야기로
자주 말을 걸어볼게요.
당신도 분명 그걸 더 좋아할 테니까요.
어느덧 밤이 깊어졌습니다.
오늘도 편안히 쉬어요, 정숙 씨.
내일 또 이야기 나눠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