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5.27 (화)
정숙씨가 떠난 뒤, 마음 한편이 휑하게 비어버렸다.
그 빈자리는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무심히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도,
그 사람의 빈자리는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하지만 나는 더는 무너질 수 없었다.
남겨진 삶을 살아야 했고,
그 시작은 몸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었다.
걷는 것조차 버거웠던 다리,
늘어지는 어깨를 이끌고
집 근처의 가까운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100평 남짓한 운동 공간.
낯선 기구들 사이로
각자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 틈에서 나도 조용히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내 몸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직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되새기듯이.
무리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저 어제보다 한 걸음만 더.
러닝머신 위에서 흐르는 음악이 귓가를 스쳤고,
몸에서는 땀방울이 쏟아졌다.
그 땀은 단지 운동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메마른 내 마음을 적셔주는
오뉴월의 단비처럼 고마운 것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따뜻한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줄기 아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오늘의 무거운 생각들도 조용히 씻겨내렸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피트니스 센터 문을 나서는 순간,
길가에 핀 새하얀 수국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을 타고 살랑이는 꽃송이 하나가
마치 “수고했어요”라고
내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꽃을 바라보았다.
지친 몸보다 마음이 먼저 풀어졌다.
문득, 그 사람이 떠올랐다.
우리의 마지막 외출이었던 포천 광릉수목원.
그날, 그 사람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수목원의 한쪽 길목,
촉촉한 공기 속에서 피어난
새하얀 수국이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숙씨는 수국 앞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꽃잎에 닿은 그 사람의 손끝.
그 감촉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얀 수국은 말이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 침묵은
때로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하지 않는 색,
흙의 성질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백의 고요함.
그 모습이 어쩌면 그 사람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다음에 꼭 다시 와요.”
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그 사람은 떠났고,
나는 그 길에 홀로 남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날 정숙씨를 조용히 품고 있던 벤치 옆 수국을 다시 만나러 가리라.
바람을 따라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을 그 꽃 앞에 서면
아무 말 없이 잠시 머물다,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말하게 될 것이다.
"다시 왔어요. 그립습니다. 지금도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