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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냄새와 발레 슈즈

2025.5.28 (수)

by 시니어더크


하루 종일 햇살이 따사롭게 머물렀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런데 오후 한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짧고도 반가운 여름비였다.
무더운 공기를 한바탕 씻어낸 뒤, 마음까지도 맑아진 듯했다.


창가에 서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 여름날의 산책길이 떠올랐다.
우산 하나를 함께 들고,
빗길을 걷던 두 사람의 모습.
빗물이 스며든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촉촉하다.
그 사람은 비 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했다.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정리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녁 무렵, 운동을 마치고 돌아왔다.
무얼 해 먹을까 싶어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
괜히 문만 들여다보다가,
식탁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딸아이가 들어왔다.
발레 연습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큼직한 종이백이 들려 있었다.
종이백을 여는 순간,
뜨거운 기름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갓 튀겨낸 치킨의 고소함이 집 안 가득 번졌다.
그 냄새 하나로 기분이 확 바뀌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먹고 싶어서 샀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달라졌다.
혹시, 아빠가 저녁 준비로 힘들까 봐
그 수고를 덜어주려는 마음도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아이는 예전부터 그런 마음을 잘 보여주는 아이였다.
생일마다 오빠와 함께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고,
결혼기념일이면 몰래 편지를 써두기도 했다.
겉은 무뚝뚝해도 속은 누구보다 따뜻했던 딸.


딸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발레를 배웠다.
하얀 타이즈에 분홍 발레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 거울 앞에 서 있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머리 올린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그 아이를 바라보던 아내는 자주 말했다.
“진짜 발레리나 같아.”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발레를 그만두었다.
가정형편상 더는 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발레복을 내놓았다.
그리고 아내는 작은 방 안에서
그 발레복을 장롱에 넣으며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 시절, 아이의 꿈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딸은 성인이 되었고
발레를 다시 시작했다.
전문 발레리나는 아니지만,
지친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방법으로
발레를 택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땀에 젖은 발레복을 들고 조용히 들어오는 딸의 모습에서
단단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 모습이 참 대견하다.


우리는 치킨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생각나지? 엄마는 닭날개 제일 좋아하셨잖아.”
나는 닭다리, 엄마는 날개, 딸은 가슴살.
누구 하나 다투는 일 없이
우리는 늘 잘 어울리는 식탁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닭날개 하나가 왜 이렇게 허전한지 모르겠다.
음식 하나에도,
그 사람의 자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따라 그 치킨 냄새가
아내의 웃음소리를 불러오는 듯했다.
딸의 발레 슈즈 소리, 아이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아내와 함께했던 식탁.
모두 그립고, 모두 소중하다.


다음엔 꼭
아내가 좋아하던 후라이드 치킨으로만 준비할 생각이다.
양념은 싫다며 손도 안 대던 그 모습이
오늘따라 더 선명하다.


밤이 깊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부디 평안하기를.
오늘도, 아내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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