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술적 자유
어느새 자유의 육각형 중 마지막 꼭짓점에 도달했습니다. 자유의 육각형에서 예술적 자유를 정의하자면, 자유롭게 표현하고 감상하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나름의 자유관을 이해하셨다면, '자유롭게'의 의미가 표면적인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으실 겁니다.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알고 그걸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감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닌데? 예술은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즐기는 거야.'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향상 규범적인 사람이라서, 막무가내식으로 즐기는 건 예술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예술이라기보다 몸짓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몸짓 중에서 진정한 자유 위에 있는 것들이 예술이라고 감히 정의해 볼까 합니다. 어떤 말인지 좀 더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몸짓이라는 말이 나와서 비유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흥이 나면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흥이 날 때 춤추는 몸짓은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기분 따라 흔드는 몸짓은 타인이 보기에 아무런 감흥이 없거나, '저 사람의 기분이 좋구나' 추측하게 만들 뿐입니다. 심지어 산만한 몸놀림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습니다. 반면 기쁨의 표현과 전달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행하는 안무는 어떨까요? 보는 사람도 저절로 흥이 나거나, 적어도 기쁨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섬세한 몸짓 말입니다. 이러한 안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절한 수련이나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술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르는 역량을 예술적 자유라고 정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그저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깊고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는지는 각자의 감상 역량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작품을 내키는 대로 감상하는 게 아니라 자유자재로 해석하고 확장하는 것이 예술적 자유입니다.
예술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건 일종의 부자유입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게 뭔지 몰라서, 기술이나 재능이 부족해서, 혹은 청중에 따라 적절한 방식을 구현하지 못해서와 같이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연의 슬픔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She's Gone>이라는 곡을 불렀지만, 고음처리를 못한다면 어떨까요? 일상의 편안한 감상을 표현하려고 스케치를 했더니 산만한 낙서만 그려지면 어떨까요?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다곤 하지만, 남들에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면, 누구나 적당한 교육과 연습을 통해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자유 영역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자유도 수동적 자유와 능동적 자유로 나누어보겠습니다. 수동적인 자유란 나의 자유로움에 영향을 끼치지만 외부의 요인에 의한 것들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타고난 재능이나 감각은 각자의 통제 밖에 있는 요소입니다. 그럼에도 예술적인 퍼포먼스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수동적인 자유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창을 예로 들면 타고난 음색이나 절대음감 같은 감각이 그런 종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연습을 통해 개발할 수 있는 부분도 충분히 있습니다. 혹은 이론을 익히거나 특정한 장르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표현과 감상의 폭을 더욱 자유롭게 넓힐 수도 있습니다. 한편, 예술 작품의 존재를 찾아 나선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한 탐색 활동은 개인이 능동적으로 넓히거나 줄일 수 있는 행위입니다. 지역에 어떤 미술관이 있는지, 지금 어떤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요즘 유행한다거나 새롭게 등장한 작가는 어떤 사람이 있는지 등. 예술적 경험의 폭과 깊이는 어느 개인의 예술적 자유도를 상당히 결정하는 요인인 것 같습니다.
예술적 자유는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3대 영역 중 한 가지입니다. 삶에 필수적인 3대 영역은 신체, 정서, 인지였고,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나머지 두 가지 영역은 경제적 자유와 기술적 자유였습니다. 예술적 자유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방식은 다양한 경로가 있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는 것 같습니다. 작품의 형태가 어떻든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작품에 녹아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작품은 내 삶과 공명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소비되는 전설적인 작품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통찰하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은 다른 사람의 삶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삶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간접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을 가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창작을 하고자 하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삶의 일부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그로부터 일말의 가치가 생겨났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읽고 쓰고, 부지런히 살아가면서 글감을 글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예술적으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바 대로 100%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술적 자유를 더욱 갖추게 된다면, 글 쓰는 능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여서 더욱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도 여러 주에 걸쳐서 연재물을 올릴 정도는 됐으니 꽤나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술적 자유는 특별히 다른 자유 영역과 깊이 상호작용합니다. 특히나 몸, 마음, 그리고 인지적인 자유 영역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체, 정서, 그리고 인지적인 활동에 대해 충분히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표현의 수단이 유연하고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의 세 가지 자유 영역을 넓히려고 노력한다면 예술적 표현의 자유도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특정한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영역에 대해서 투자를 한다면, 더욱 효과적인 투자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몸을 아름답게 움직이려면 신체적으로 너무 뻣뻣하거나 무거우면 제약이 있을 것입니다. 춤으로서 충분히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신체적인 자유를 어느 정도 확보하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예술적 자유를 능동적으로 넓히려면 감상이나 표현의 경험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면, 그러한 경험을 쌓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많은 경우 예술가들은 예술적인 활동만으로 정기적인 수입을 만들어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술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서로를 정체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부득이 부업 활동을 하거나, 본업을 두고 예술 활동은 뒷전으로 밀려나가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수입을 위한 직장생활을 따로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궁극적인 자유에 더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시리즈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너무 부족한 글이지만 시간 내서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때마침 제가 구직에 성공하게 되어서, 조만간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게 됩니다.
남은 시리즈를 잘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생활은 안정되겠지만 글 쓰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 것 같습니다.
워크-아트-밸런스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더욱 자유로운 상태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