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번아웃을 극복하며 일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
해외 사업 답사를 위해 출국한 후 한 달 동안의 긴 여행은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IT 산업은 위태롭게 변해 있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드롭되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들이 계획되어 있는 것처럼 몰아닥쳤다. 무리하게 과중된 업무 스트레스, 혹은 계획에 없던 변화로 인해 번아웃이 생기는 것 같다. 번아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직업에 대해 더 많이 고만하게 는 것 같다.
IT 산업의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한 2022년
대기업에서 앞다퉈 신규 프로젝트를 띄우면서 인력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부 외주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다음 해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치솟는 인건비, 인력 부족 현상과 더불어 허위 경력 또는 경력 대비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인력들까지 IT 시장에 진입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대기업과 외주 기업 간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기업 내에서는 자사 정규직 채용 인원수를 늘리기 시작했으며 외주 사업의 한계를 예고하고 있었다.
모든 산업은 공급과 수요가 일정하게 상승할 때 성장한다. 일이 넘쳐나더라도 그 일을 처리할 수 없는 인력이 부족하면 여러 가지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2022년은 IT 산업의 수요와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기점에서 다음 해의 불안감을 안고 있는 듯했다.
위태로운 한국의 IT산업
2023년 한국에 오자마자 1억 미만의 소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그리고 6월, 두 건의 프로젝트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2022년 하반기에 예상했던 대로 IT 시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금리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작년에 예상했던 우려들이 생각보다 더 빨리 현실로 다가왔다. 6월에 시작하기로 했던 프로젝트 두 건이 드롭되면서 회사가 위태로운 상황에 몰리기 시작했다. 사실 SI 사업은 회사 설립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빠르게 사업 방향을 바꾸고 체계를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IT 시장의 분위기, 사업 아이템, 창업 목적 등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고 정비하는 과정에서 진심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의 수많은 자서전을 들여다보며 따라 해 보기도 하면서 맞지 않은 옷을 수 없이 입었다 벗었다 하는 기분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성과가 없는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회사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SI는 사업이 아니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자사 플랫폼을 개발하여 오픈을 앞두고 있었지만 투자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 시장 조사 당시에는 대기업에서 손대지 않은 서비스였기 때문에 개발을 시작했지만 개발 완료 단계에 대기업에서 일부 서비스가 비슷한 베타 버전을 급하게 오픈해 버렸다. 그래서 발 빠르게 서비스 방향을 바꿔 고도화한 후 오픈하려고 했지만 이용자 확보를 위한 마케팅 예산이 부족하다.
회사에 플랫폼 개발을 의뢰했던 중견 기업 회장님의 말에 따르면 자사에서 개발한 플랫폼을 운영하려면 100억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사업은 기술력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투자 유치 능력도 중요하며 한국에서 IT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맥이 받쳐줘야 한다. 인맥에 앞서 학연을 만들 수 있는 스펙과 정치권 또는 공공 분야의 인맥, 투자 기업, 대기업 인맥이 있어야 한다. 보통 대기업에서 외주를 받는 기업의 경우 대기업 임직원 출신이 창업 후 고정적인 외주 업무를 맡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공공기관 사업을 수주해 시제품도 만들지 못하고 세금만 까먹는 회사들을 많이 본다. 기업의 기술력 보다 대표이사의 스펙이나 학연, 지연, 혈연을 믿고 추진한 결과다.
IT 기업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
힘들게 개발한 플랫폼으로 해외 진줄 기회를 노려 보기로 했다. 캐나다 정부는 IT 기술자를 영입하기 위해 캐나다 내 법인 설립을 하는 외국인에게 우호적인 상황이다.
우연히 알게 된 캐나다 스타트업 비자 프로그램을 알아보았다. 캐나다 현지 변호사를 통해 사업소개서를 전달 후 수차례 화상 미팅 후 캐나다 현지 엑셀러레이터의 추천을 받기로 했다.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는 한국인들로부터 투자를 받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용이 면제되며 실제로 영주권 취득을 위한 공공기관 행정 처리 비용만 발생한다. 캐나다가 정부가 LBS 산업을 육성하는 시기라서 캐나다에 진출하기가 유리했다.
참고로 한국에서 LBS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방통위에 위치기반 사업자 신고를 해야 한다. 서비스를 정식 론칭을 하지는 않았지만 개발 완료 후 위치기반서비스사업신고필증을 받아 놓은 상태라 매년 갱신을 하고 있는데 해마다 관련 정책과 기준이 까다로워지는 듯하다. 10년 이상 대기업 외주 개발을 경험한 입장에서도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과연 영세한 스타트업들은 어떻게 체감하고 대처할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한국에서 IT 사업을 하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단순히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을 뿐인데 기업의 경영, 영업, 인사 및 노무, 세무, 기술개발, 법률까지 중소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많을 뿐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각종 규제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약 2개월간 캐나다 현지 법인 설립을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현지 변호사 수임 계약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가족들에게 캐나다 이민을 권유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스타트업 비자를 포기하고 한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사업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정체성 찾기
가장 잘하는 일 중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창업을 했었다. IT 분야의 틈새시장을 발견하고 창업을 결심한 이후로 10년이 지났다.
2014년 강남의 스터디 카페에 대형 에이전시 출신 리더들이 모였다. 경력 15년 차 이상의 각기 다른 포지션의 리더들이 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15년 경력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일에 투자한 시간 대비 효율 및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을 찾아가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찾은 일은 IT 사업 컨설팅과 교육 사업으로 정리했다.
당시에 대기업에서는 해외 컨설팅 회사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1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리더들이 국내 시장에서 컨설팅 사업을 전문화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창업 당시 계획했던 컨설팅보다는 창업 전부터 꾸준히 해 왔던 SI 업무로 매출을 유지하게 되고 가끔 컨설팅 제안 요청을 받게 되더라도 이미 거래하고 있는 외주 개발사를 지정 후 형식적인 비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지인이었던 해당 기업의 임원으로부터 확인한 바로는 내정된 사업의 비딩이었다고 한다. )
"대기업에 의존적인 사업을 과연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면 마케팅이나 광고를 통해 매출을 기대할 수 있지만 대기업 위탁 사업은 많이 다르다. 학연, 지연으로 이뤄진 영업 라인을 뚫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 거래하는 대기업의 상황에 따라 하청 업체의 매출이 좌지우지된다. 아마 이 부분은 대기업에 의존적인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가장 잘하는 일,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일을 선택할 때 가장 잘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까? 둘 다 해당되는 경우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만 가장 잘하는 일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과 차이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창업을 할 때나 창업 이후에도 여러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사업이 좋은 사업일까 아니면 내 시간과 수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업이 좋은 사업일까? 마찬가지로 둘 다 해당되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창업 초기에 후자의 상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창업 후 기업을 먼저 생각하다 보면 월급은 직장을 다닐 때 보다 적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필자도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 번아웃을 경험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지만 결과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빠르게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인생의 후반전, 어떤 일이 좋은 일일까?
작년부터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고 눈가 주름의 깊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어떤 일을 하면 후회가 없을지 더 많이 생각해 보게 되는 시기인 것 같다.
" 열심히 일하고 돈도 많이 모았는데 늙어서 여행 좀 다니려고 하니 기운이 없어서 다니기도 힘들더라."
누구에게 들었는지 실감 나는 말인 것 같다. 이전에는 현재의 삶 보다 미래의 삶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번아웃을 겪은 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미래의 삶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삶이 더 중요해졌다.
일을 선택할 때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다 보니 사업체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삶을 윤택하게 살기 위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즐겁게 사는 방법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기로 했다.
스트레스받는 일을 줄이다 보니 회사의 사업 규모를 줄이고 매출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시간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일, 시간 투자 대비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을 정리하며 사업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