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의 연애란
최근 연애를 주제로 나눴던 대화들 중 재미있는 게 많았다. '요누남'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떤 아이가 솔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밝히자 그의 친구들이 '요누남 모임에 온 것을 축하해!'라고 말했다. 풀어쓰면 '요즘 누가 남자 만나니' 모임이다. 몇 달 전 내가 친구에게 "너는 요즘 연애 안 해?"라고 물었을 때 그녀가 새침하게 "요즘 누가 연애를 해~ 촌스러~"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두번째는 '아만추'다. 오늘 들은 따끈따끈한 단어다. 솔로인 친구에게 "너는 자만추야 인만추야?"라고 물었는데 어느 쪽도 아닌 "나는 아만추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만추가 뭐야?
아무렇게나 만나는 것 추구!
말이 끝나자마자 둘 다 한참을 웃었다. 반은 실소였고 반은 공감이었다. 그래, 만나는 방법 따위 뭐가 중요하리.
21세기의 사랑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에 연애를 한다는 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요누남'이라는 단어는 [2020년, 서울]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에서 비연애가 삶의 방식 중 하나로 공고히 자리잡았다는 걸 보여준다. 데이팅 앱이나 클럽에서의 만남이 분모를 확장하는 것이라면 비연애는 분모를 0에 가깝게 조정하는 행위다. 무엇을 절대 안 하기로 선언한 순간부터 그걸 욕망하지 않을 수 있으니깐. 그들에게 "너도 사람인데 외롭지 않아?"이라고 묻는 것은 비건에게 "너도 솔직히 고기 땡기지?"라고 말하는 무지와도 비슷할지 모른다.
한편, 오늘 아만추 친구를 기다리며 서점에서 잠깐 읽은 <페스트>의 도입부에는 이런 문단이 있었다.
그와 반대로 오랑은 아무리 보아도 낌새가 없는 도시, 즉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다. 따라서 우리 고장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이른바 성행위라고 하는 것 속에 파묻혀서 짧은 시간 동안에 서로를 탕진해 버리거나 아니면 둘만의 기나긴 습관 속에 얽매이는 것이다. 그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중간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도 역시 독특한 것은 못 된다.
낌새가 없는 도시라는 표현은 잘 와닿지 않는데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카뮈는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방식'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며, 오랑이라는 도시의 남녀가 '섹스라는 자극에 파묻혀서 짧은 시간에 서로를 탕진하거나 둘만의 기나긴(고루한) 습관 속에 얽매인다'고 표현하고 있다.
왠지 2020년의 서울과 비슷해보인다.
잠잠해져가던 코로나 역병에 불을 붙인 이태원 게이클럽 때문에 성소수자에 관한 혐오가 만연하고 있지만 꿋꿋이 이야기를 해보자면, 영화라는 매체에서만큼은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온전하게 그려진 지 오래다. <캐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브로크백 마운틴>을 한 축에 두고 <클로저>, <우리도 사랑일까>, <결혼 이야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같은 영화들을 다른 축이라고 생각하자. 앞서 열거한 퀴어 영화들이 '장애물을 뚫는 사랑'에 방점을 둔다면 후자의 이성애 영화들은 '사랑을 허무하게 만드는 현실의 장애물'에 방점을 두고 있다. 단순히 퀴어가 하위문화로서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앞의 영화들이 실제로 이성애자 관객들의 마음조차 사로잡았다는 점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본질과도 관련된 유일성의 문제라고 생각해본다. 이성애는 더 이상 유일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자만추니 인만추니 하는 것도 취향의 문제일 뿐이지 '사랑의 후보'를 찾는 것은 사실 쉬워졌기 때문이다.
반면 퀴어적 사랑은 희귀하다.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보아도 그가 이성애자일 99%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고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이어지는 확률에 비해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가 이어질 확률은 현저히 낮을 것이다. 이는 동성혼인이 합법인 네덜란드에서도 뉴욕에서도 마찬가지다.
손에 넣기 어려울수록 가치가 커지는 논리는 경제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이지만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쉽게 얻어진 것에 가치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물질이 과잉인 것과 마찬가지로 관계도 과잉인 시대다. 하지만 반쪽을 찾는 건 우주적인 확률과도 같기 때문에 여전히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어느 인간이 이리저리 재 보고, 말을 섞어보고, 마음속으로 평가를 해보는 이성의 수는 1990년에 비해 2020년에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말하자면 누군가를 찾아 결혼하기까지 1/10 확률을 뚫으면 되었던 시절에서 1/1000 확률로 낮아진 거다. 현대인의 공허함이 깊어지는 이유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기계와 사랑할 수 있어지는 시점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사랑이 현실화된다면... 가능성의 분모는 무한대가 될 것이다. 아무나 만날 수 있는데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 평생 알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