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
누벨바그 영화들을 멀리 하고 싶은 괴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반 아이들의 90%가 좋아하던 빅뱅 노래를 외면했던 것처럼, 주변에 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들의 SNS에 꼭 한 번씩은 등장하는 프랑스 영화들의 전형성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교 강의에서 배우는 영화의 역사 중 중요한 지면을 차지하는 누벨바그 사조. 그에 속하는 감독들이 시도한 예측불가능한 서사와 전형을 탈피하는 카메라 기법, 그들의 과감한 시도가 후대 영화계에 미친 영향과 같은 내용을 접했을 때 가슴이 몰래 뛰었으면서도, 그것마저 좋아해버리면 대책 없이 '감성 빼면 시체' 같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던 듯 하다. 그러면서 홍상수 영화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으니 일종의 자기기만적인 태도였다.
서론이 길었지만, 하여간 나는 누벨바그 대표작 중 하나인 <녹색 광선>을 보았다. 파리에 살고 있는 델핀은 여름휴가를 앞두고 상념에 빠진다. 휴가를 같이 갈 사람이 없는 것이다. 친구들이 남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하거나, 부둣가에서 매력적인 남성을 마주치기도 하지만 잘 성사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다 짝이 있는데, 왜 나는 없지? 그런 생각에 사무칠 때마다 델핀은 눈물을 훔친다. 휴가를 날려버릴 수는 없어 친구 가족들이 있는 쉘부르에도 가고, 혼자 해변가에도 놀러가 보지만 델핀이 고대하는 로맨틱 가이와의 우연한 만남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델핀은 외로움에 지고 마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동정을 사는 인물은 아니다.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외로움과 우아함, 사랑스러움이 공존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억만장자가 되면 아무 고민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델핀의 외로움은 그녀가 가진 다른 삶의 장점마저 무채색으로 만들 만큼 진지한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외로움을 다룬 여타 영화들과는 달리 <녹색 광선>을 보며 나의 마음은 별로 요동치지 않았다. 내가 외로움이라는 근원적인 감정과 작별한 것일까? 그렇다 하기에는 몇 주 전 <우리도 사랑일까>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래서, 다른 영화들이 외로움을 다룬 방식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독일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도 델핀처럼 젊고 사랑스럽지만 외로운 존재다. 게다가 <파니 핑크>의 원제는 'Keiner Liebt Mich',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니깐, 젊은 아가씨의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더욱 정면돌파하고 있는 셈이다. 공항 검색대에서 일하는 파니 핑크는 29살이 되었지만 사랑하는 남자도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를 운명의 상대로 여겨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일부러 그의 차를 들이받지만, 그가 별볼일없는 바람둥이일 뿐이었던 탓에 파니의 좌절감은 커질 뿐이다.
<파니 핑크>를 처음 보았을 때는 고등학생이었고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두 번 다 극중 파니의 나이인 서른 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녀의 감정에 많이 공감했고(물론 두 번째 감상 때의 공감이 훨씬 컸다), 분명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영화였음에도 비주얼보다는 감정선이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았다.
외로움에 관한 또 하나의 영화로는 <헤드윅>이 있다. 여기서는 외로움의 무게가 한층 깊어진다. 혼란스럽던 1900년대 중반, 독일에서 태어나 사랑하는 이를 따라 미국으로 가고, 사랑을 위해 자신이 성(sex)까지 바꾸지만 결국 사랑에 배신당하는 헤드윅. 그렇게 너덜너덜해지고 나서도 새로운 사랑을 감행하고, 더 큰 배신에 직면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버리기는커녕 그것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감싸안기에 이르는 사람... 나는 성전환수술을 받지도, 사랑을 따라 국적을 바꾸지도 않았지만 헤드윅의 상처에 깊이 공감했고 아파했다.
파니와 헤드윅에게 연민을 느꼈던 이유를 돌이켜보니, 반대로 <녹색 광선>의 델핀에게 그러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델핀의 외로움은 시도의 좌절(파니 핑크)이나 자아와의 싸움(헤드윅)이 아닌, '우연에 대한 기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델핀이 우연한 사건에 상징적인 의미를 곧잘 부여한다는 사실은 두 번의 카드 장면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초반, 길거리에서 스페이드 퀸을 발견한 델핀은 그것을 부정적인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장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델핀은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있지만, 얼마 전 기분 나쁜 카드를 보았다며 불안함을 내비친다. 친구는 그런 델핀을 다소 유치하게 여기는 듯 하고, 상처를 받은 델핀은 울어버린다. (이후에도 그녀는 자주 운다.)
다음으로, 델핀은 부둣가에 친구와 함께 서 있다가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다. 친구는 어떻게든 델핀을 그와 엮어주고 싶은 듯 약속을 잡아보려고 하지만, 델핀은 그가 마음에 드는 듯 부끄러워하면서도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당연히 그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델핀의 기대감은 점점 깎이기 시작하는 듯 하다. 만약 <녹색 광선>의 중심 테마가 성장이었다면 델핀은 이상적인 상대를 목빠지게 기다리기를 멈추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델핀으로 하여금 '우연히' 어떤 중년 여성들의 대화를 엿듣게 한다. 그 대화를 통해 델핀은 녹색 광선의 존재를 알게 되는데, 녹색 광선이란 아주 맑은 날 해가 수평선 뒤로 넘어갈 때 발생하는 자연적 현상으로,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제 우연과 운명을 믿는 델핀은 녹색 광선에 꽂혀버렸다. 심지어, 그 전에 주웠던 두번째 카드가 예감이 좋은 '하트 킹'이었기에 델핀의 기대감은 더욱 높아진 상태다.
다음으로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델핀은 기대감을 반영하듯 녹색 모자를 쓰고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 이루어지면 너무 시시할 것이 뻔하다. 멍청한 소리만 해대는 남자를 보며 델핀은 으악!!! 하고 도망가 버린다. 이쯤 되면 델핀은 모든 게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대견하게도 이번에는 울지 않고 침착하게 기차역으로 향한다. 이제 결론을 맞이할 시간이다.
기차역에서 델핀은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난다. 나는 잠깐 이 영화가 <비포 선라이즈>보다 9년이나 먼저 나왔다는 사실을 잊고, 기차역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여자 주인공을 보고 훈훈한 남자가 말을 거는 설정을 또 쓴다고? 완전 클리셰잖아! 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칠 뻔했다.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보니 1986년에는 그런 서사가 충분히 신선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델핀은 낯선 남자를 따라 행선지를 바꿔 쌩 장 드 뤼즈라는 낯선 마을으로 간다. 영화를 통틀어 델핀이 처음으로 용기를 낸 순간이다. 이들은 함께 녹색 광선을 보고 영화는 끝난다. (흔히 홍상수 감독을 로메르에 비교하곤 하는데, 다른 영화는 몰라도 <녹색 광선>이 내리는 결론은 홍상수 영화의 시니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델핀의 여정을 따라가며 '우연'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파니 핑크나 헤드윅, 나아가 외로운 인물을 다룬 작품들과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파니 또한 '23'이라는 숫자에 집착하고, 결국에 그 상징과 연관이 있는 남자와 이어지며 결말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파니는 델핀에 비하면 훨씬 능동적이다. 호감을 느낀 상대의 차를 들이받거나, 사랑을 기원하는 사이비 주술을 하기도 한다.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명상도 한다. 파니는 울지도 않는다.
헤드윅은 능동적인 정도를 넘어 사랑에 모든 걸 내던지는 인물이다. 속된 말로 '노빠꾸'라고나 할까? 델핀이 로맨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인물이라면, 헤드윅의 앞뒤 재지 않는 과감함은 그의 인생을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이끌고 간다.
파니와 헤드윅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쳤지만 외로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아이러니함이 그들의 아픔을 훨씬 돋보이게 했다. 다른 예시들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녀>의 테오도르도,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고도, <셰임>의 브랜든도, 형벌처럼 주어진 외로움에 맞서 각자의 방식대로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외로움에도 결이 있다면, 방금 언급한 인물들의 '처절한 외로움'에 비해 델핀의 상태는 '우아한 외로움'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델핀을 철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던 친구도 비슷한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도 안 하면서 외롭다니 그건 사치야" 라는 것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그렇게 비판하기에는 델핀이라는 캐릭터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 또한 우연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그저 평범할 뿐인 나의 삶을 괜히 가엾게 여겼던 것은 아닌지, 돌아봄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토익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점수가 오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진을 건지려면 멋진 여행지에 가야한다. 이처럼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인과관계를 투명하게 인식하면서, 유독 관계, 특히나 연애에 대한 문제만큼은 그토록 우연에 기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에릭 로메르 감독이 짓궂게도 델핀으로 하여금 상반된 두 장의 카드를 줍게 하고, 녹색 광선이라는 고대 백과사전에나 나올 것 같은(실제로 로메르 감독은 보았다고 하지만) 썰을 듣게끔 했듯,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았거나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는 우연한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 우리를 끊임없이 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